동글동글한 언덕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집들 사이사이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기대어 사는 논밭이 펼쳐지고, 마을 끝 자락에는 잔잔한 바다가 시작된다. 호수처럼 얕은 파도가 오가는 바다를 따라 조금만 눈을 돌리면 마을 앞 방파제처럼 작은 ‘농섬’이 떠 있다. 그 앞으로는 질척질척한 갯벌이 펼쳐진다. 그 갯벌로만 나서면 철마다 낙지며 굴이며 조개가 그득하다. 그 갯벌과, 그 바다와, 그 논밭 위로 폭격기들이 54년 동안 날아 다녔다.
2005년 폐쇄될 때까지 54년 동안 미국의 태평양 미공군사령부 산하 대한민국 주둔 제7공군 소속의 미군 전용 폭격장소였던 쿠니 사격장. “실제로 파괴가 가능한 표적을 갖춘, 실제로 포격을 할 수 있고, 실제 표적의 피해를 알 수 있는 아시아의 몇 안 되는 훈련장”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가는 마을이 바로 코앞이라 전쟁 상황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연습장” 그 폭격기 아래에서 54년 동안 살던 매향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1.
신혼의 단꿈을 꾸어야 할 사람들은 탈출만을 꿈꾸었다. 이 마을의 출산 준비물은 예쁜 배냇저고리도 아니고 산책 나갈 유모차도 아니고 아이 귀를 막아 줄 솜이었다. 밖에서 노는 건 엄두도 못 내는 동네에서 아이들이 자라났다. 결혼 전에 미리 알았다면 절대 안 왔을 길이었다. 평생 같이 할 여인에게 말 못할 비밀을 하나 눙치고 있어야 했던 이 마을 사내들의 마음 속 불안함도 헤아릴 길이 없다. 폭격기 소리에 움찔거리고 포탄 소리에 놀라면서도 삼시세끼 차리다 보면 어떻게 하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노인들은 떠나갔다.
“아기를 낳고 기르기가 너무 힘든 거야. 다들 아실 꺼야. 날마다 이혼하자고 그랬어. 나가서 살 거 아니면 이혼하자고 그랬어. 말을 안 한 것도 거짓말이라고 막 따졌어요. 그러면 입을 꾹 다물고 들어줘요. (결혼 전에 미리) 말을 안 한 죄로 그 소리를 다 들어주는 거지.(…) 애들 잘 때면 배 위에다 베개를 올려놔요. 이렇게 눌러주면 애가 경기를 안 하니까.”
2.
매화꽃 향기가 나던 마을에는 이제 포탄 연기가 자욱했다. 사람들의 마음만큼이나 마을의 집에도 균열이 갔다. 슬금슬금 줄이 간 구들장에서는 연탄가스가 새어 나왔다. 상쾌하게 잠에서 깨어나야 할 아침이면 가스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라 동치미 국물부터 들이켜야 했다. 한번 사면 지겨워질 때까지 걸어 놓는 벽시계가 이 마을에서는 툭하면 고장 났다. 그 흔들림을 하루 종일 견디다 보면 시계조차 온전치가 못했다. 자식들 출가시키며 찍은 결혼 사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들 사진도 벽에 걸어놓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일상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큰 폭탄이 떨어질 때는 이게 다 흔들려요. 유리창이고 뭐고 다 부서져요. 저기 저기 금간 거 좀 보세요. 다 부서졌어요. 유리창 깨지고. 기왓장 날라가고. 찬장에 그릇도 쌓아 놓아 봐요. 우르르 쏟아지지. 아무것도 못 걸어요. 죄다 떨어져. (…) 시계를 사다 걸면 맨날 고장이 나요. 맨날 흔들어 재껴서. 보자기에 뭘 싸가지고 버스를 타면 그 집 시계가 또 고장이 난 거지.”
3.
그 사격장을 만들기 위해 한 가족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던 논밭은 자갈로 메워졌다. 뼈 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으로 산 귀한 땅들은 어이없는 가격으로 후려쳐졌다. 알음알음으로 거래했던 미등기 토지는 보상금조차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육상사격장 부지로 징발된 땅에서 가을걷이를 앞두고 있던 벼들은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벼를 키우기 위해 파 놓았던 웅덩이 속으로 다 자란 벼들이 손 쓸 틈도 없이 밀려 들어갔다. 농작물을 내다 팔아서 만들어야 했던 학자금은 고사하고 당장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가족의 삼시세끼가 막막해졌다.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서웠던 그날의 포크레인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아픈 기억이다.
“어둑어둑한데도 아버지가 안 오시니까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돼서 찾아갔는데 추수한 볏단을 이렇게 쌓아놨어. 그 많은 걸, 세상에, 미군이 포크레인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그 웅덩이에다, 세상에나, 포크레인으로 쌓아놓은 것을 다 집어 넣는 거야. 어린 내가 볼 때도 진짜 눈이 뒤집혀서 뒤로 넘어가겠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짚 더미를 부둥켜 안고서 포크레인 앞에 가 가지고, 하지 말라고 그래도. (…..)아버지가 철철 우는 것을 내가 부축해서 집으로 왔어. 그래서 우리는 거지가 됐지”:
4.
쏟아지는 포탄 껍질을 팔아서 살아 가던 사람들도 있었다. 농사 지을 땅 대신, 조개 캐러 갈 갯벌 대신 새롭게 생긴 밥벌이였다. 고철 탐지기를 사다가 탄피를 탐지하는 이들도 생겨날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다들 폭격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폭격이 멈추는 순간 탄피가 떨어졌을 만한 지점으로 재빨리 가야 했다.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먼저 도착해서 찾아 낸 사람이 비싼 탄피의 임자였다. 탄피를 두고 벌이는 생존의 싸움이었다. 불발탄을 주워서 터뜨리거나 돈을 더 받기 위해 해체하는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 전쟁 같은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게 흙 속에 배기니까(박혀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다 찾아요? 못 찾지 다. 그렇게 못 찾은 거를 주우려고 들어가는 거지. 그러다가 불발탄이 나오면 미군들한테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이걸 직접 분해해. 그래서 가져다 파는 거지. 이걸 잡으려고 경비원들이 다니고 그랬지.”
5.
차마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 마을에서는 동물조차 제대로 살지 못했다. 비행기 폭격 소리 아래에서 사람들도 살아가는데 말 못하는 동물이야 뭐 어떨까 생각했던 동물 농장들은 줄줄이 망해갔다. 그저 참 시끄럽다 참 성가시다 생각했던 비행기 소음이 동물의 생명까지도 좌지우지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폭격기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털이 길지도 않을 뿐 더러 무게도 안 나가는 거야, 털이 꼬부라지고 꾸불꾸불 하니 펴지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게 서울 공장으로 가지고 가면 털이 안 좋으니까 받아 주지를 않는 거야.(…) 비행기 소리가 너무 갑자기 나니까 (토끼가) 임신을 해도 다 지워져 버리는 거야. 폭음 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서. 2년 동안 그 돈을 다 까먹어 버렸죠, 새끼를 하나도 못 낳아보고.”
이미 6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제대로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에 미군이 폭격을 시작한 1951년에 태어난 아기는 어느 새 68세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쿠니 사격장이 정식으로 건립된 1968년에 건장한 청년이던 이들은 이미 70, 80을 훌쩍 넘긴 고령이 되었고, 폭격 소리만 평생 듣다가 무덤에 묻힌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것들은 마을 주민들이 만든 역사관에 남은 물건 몇 가지와 마을 입구에 가득한 포탄 껍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