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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Nov 05. 2019

[마을 여행] 풍요로운 바다의 기억

차를 타고 화성호 방조제 도로를 달리면, 구간별로 달라지는 풍경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바다만 줄곧 보이는 일반적인 해안도로의 풍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운평리로 향하는 길, 일직선의 도로를 기준으로 왼쪽은 육지, 오른쪽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로 다른 그림이 펼쳐진 동화책과 같은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간척 사업으로 인해 과거 바다였던 곳은 평탄한 육지로 변하였지만, 화성호 유역 마을들은 풍요로운 바다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조개껍질처럼 함구하고 있는 마을의 이야기들을 모두 꺼내보고 싶었다.      


운평리, 산은구름이 되고 땅은 이야기가 되고     

화성시 우정읍 운평리(雲坪里)는 산이 구름처럼 두르고 있고, 마을 한 가운데는 우물이 있어 구름울(雲井洞)로 불렸다. 고르게 일군 밭처럼 평평한 모양새의 지형 덕에 평밭(坪田洞)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운정동의 운(雲)자와 평전동의 평(坪)자를 따온 것이 오늘날의 운평리다. 

운평리에는 청주한씨 족보에 이름을 올린 유서 깊은 은행나무가 있다. 화성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무려 67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화성호가 생기기 전 남양만 시절에는 운평리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67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동안 바다가 땅이 되고, 그곳에 풀이 자라는 변화 앞에서도 은행나무는 지금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마을을 지켜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사를 지내 무사안녕을 기원한 것도 그러한 우직함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지친 일상을 뒤로한 채 휴식을 찾은 나에게도 은행나무는 잠시 기대 쉴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호곡리, 마음의 소리를 느껴보다     

호곡리(虎谷里) 역시 마을의 지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산세가 꼭 호랑이의 비범한 모습과 닮아 범아지 마을로 불렸고, 이후에는 호곡리로 지어졌다. 호곡리는 운평리 만큼이나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따금 새소리가 들려왔는데, 무심한 인사처럼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시끄러운 대화 소리, 신경질적인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도심은 모든 공간들을 소리로 채운다. 운평리를 지나 호곡리로 넘어오면 한 꺼풀 한꺼풀 덧입혀진 소리들을 벗어던지는 기분이다. 

호곡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곡리에 사는 이만경이라는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다를 막아 둑을 만들었다. 그 무렵 마을의 부자가 죽어 명당을 찾았는데 이곳을 찾은 노승에게 둑 근처에 묘를 쓰면 가문이 흥한다는 말을 듣는다. 부자의 가족들은 이곳에 묘를 쓰고자 하였으나 하늘이 노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대신에 그곳의 흙이 둑 안쪽을 메워 땅이 되었다. 이만경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 땅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풍요로운 바다를 접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힘들었던 옛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더불어 잘 살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원안리, 조선시대를 거닐다     

화성호 유역 마을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고유어가 많다. 세심한 관찰력과 정겨움이 느껴지는 그 말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원안리(元安里)는 운평리와 같이 마을 한 가운데 물이 잘 솟는 우물이 있었다. 널판으로 우물의 터를 만들었기 때문에 원안리는 과거 ‘널우물’이라고 불렸다. 우물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중엽, 원안리에 정착한 이씨는 우물을 파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샘이 터져 버렸고,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때마침 길을 지나던 도사는 그 모습을 보게 되었고, 커다란 바윗돌로 샘을 막아주었다. 이후 샘이 알맞게 솟아나고, 마을에는 평안이 찾아와 원안리가 되었다는 설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샘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요로운 마을들의 이야기. 이야기를 따라 흘러오니 어느 덧 주곡리 선창포구에 도착했다. 화성방조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은 서해 남양만의 안 쪽에 자리한 포구였다. 1980년대 수원에서 발안, 그리고 선창포구까지 포장도로가 생기면서 접근성이 좋아져 많은 횟집과 생선가게들이 선창포구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곳에는 싱싱한 해산물을 구입하고 회를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화옹방조제가 형성되면서 포구는 사라졌지만, 수산물 직판장은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외형은 조금 허름한 모양새지만, 그 안의 푸근한 인심은 예전 모습 그대로인 듯했다.      


주곡리, 한 가득 퍼올리는 넉넉한 인심     

“어디서 왔어요? 서울, 멀리서도 잘 왔네”

푸근한 인사를 건네는 상인이 맛조개와 소라를 추천했다. 된장찌개에 넣으면 그렇게 맛이 좋다고 한다. 젓갈만 사서 돌아가려고 했는데, 싱싱한 선창포구의 수산물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지갑이 열린다. 이야기와 추억을 가득 싣고 차에 오른다. 내일 바다 내음 가득한 된장찌개를 한 술 뜨면 화성에 가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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