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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Jan 22. 2019

우리 아버지의 논

누릇누릇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인다. 묵직하게 여문 낱알을 떨굴 시간이다. 자그마한 모를 내어다가 허리 높이만큼이나 키운 시간 도안 정이 들만도 한데, 썩둑썩둑 잘라내는 농부의 얼굴은 그저 환하다. 뜨거운 햇살 등지고 잡초를 솎아내고 벌레를 잡아내던 시간, 폭우가 쏟아질라 땅이 마를라 노심초사 하던 시간, 태풍도 견뎌내고 가뭄도 견뎌 내던 시간. 일년의 수고가 모두 보상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농사 짓고 사는 이들에게 땅은 목숨이고 희망이다. 

“우리 아버지가 지금 식으로 표현하자면 투잡 쓰리잡을 한 거지. 낮에는 염전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받으셨고 농사 조금 되는 건 밤에, 달밤에. 예를 들어서 콩을 턴다든가 타작을 한다든가 이런 거는 달밤에 하셨어. 그러니까 그게 투잡이지. 가끔 바다에도 가셨지. 그러니까 쓰리잡… 그렇게 달밤까지 일하면서 돈을 조금 조금 모으고, 돼지도 키우고 해서 땅을 좀 샀어. 마을 사람들이 시기질투를 할 만큼 땅을 많이 산 거야, (사격장 부지) 이쪽으로. 하필이면 이쪽으로.”

땅을 가진 농부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다. 내 땅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신바람이 나던 시절. 힘겹게 마련한 땅이 버쩍 마를 라 치면 딸의 고사리 손까지 빌어다 물을 길어 올렸다. 농업용수를 조달한 수로조차 없던 시절이라 모를 키우려면 제 논에다 물을 채울 웅덩이를 파는 건 기본이었다. 제 때 비를 내려주지 않는, 가끔은 태풍으로 모든 걸 날려버리는 하늘을 원망할 틈도 없이 소처럼 일하고 또 일했다. 힘들지만 그것이 농부의 삶이었다.   

“그 옛날에는 농수로 이런 게 없으니까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고, 자립으로다 웅덩이를 팠다고. 모를 심을 철이 되면 웅덩이를 파 가지고 우리 언니를 달밤에 데리고 가서 양쪽으로 물을 퍼 올리는 거지. 그때는 다 인력으로 했지. 그 많은 걸 인력으로 했다는 건 정말 손발 연골이 다 닳을 정도로 일을 했다는...”

봄 여름 가을 동동거리면 한 겨울 지낼 거리는 넉넉히 내어주는 땅이었다. 미군의 육상사격장이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매향리는 화성군 내에서는 부촌에 속했다. 가진 땅덩어리 하나 없이 밀려 내려온 피난민 정착촌에 비하면, 갯벌에도 나가고 땅에서도 수확할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은 부지런만 떨면 식구들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8년 사격장 건설을 위해 농경지가 징발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여기가 사격장이 51년부터 들어왔다고 하잖아요. 처음에는 농토를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다 건드린 거잖아. 처음에는 바로 안 들어갔어요. 논이 나중에 들어갔어요. 제가 55년 생이니까. 저 태어나기 4년 전에 들어온 거잖아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한참 10여년 후인 거죠. 나 중학교 다닐 땐데 사격장 안에 수십만 평이 (징발)되어 있는 거잖아.”


“근데 사람들이 (땅을) 사면 이게 내 밭이고 내 논이다 이랬지, 등기 같은 것을 바로 바로 안 냈잖아요. 서로 아는 사이니까. 사고 판 저기만 있지. 지금처럼 등기소 가서 바로 바로 안 하니까. 만평이라고 하면 5천평은 등기가 안 난 거야. 땡전 한 푼 못 받았지. 나머지 오천 평 되는 것도 시세도 안 되는 가격으로. 말하자면 뺏긴 거지. 그 때는 사실 무법천지였잖아. 아버지 엄마 세대가 많이 배우신 세대가 아니니까. 지주들 제외하고는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이었으니까.”

내 땅은 더 이상 내 땅이 아니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으로 산 귀한 땅들은 어이없는 가격으로 후려쳐졌다. 알음알음으로 거래했던 미등기 토지들은 그 알량한 보상금조차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년 내내 식구들 배를 채울 양식이 나오는, 내다 팔면 두둑한 목돈도 마련해 주는 땅이었다. 미 공군의 육상 사격장 부지로 징발된 땅에서 가을걷이를 앞두고 있던 벼들은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벼를 키우기 위해 파 놓았던 웅덩이 속으로 다 자란 벼들이 손 쓸 틈도 없이 밀려 들어갔다. 


"학교 갔다 와서 어둑어둑한데도 아버지가 안 오시니까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돼서 찾아왔는데 가을 추수해서 볏단을 이렇게 쌓아놨어. 그것도 다 낫으로 손으로 벤 거잖아요. 그 많은 걸, 세상에, 달밤에 베가지고 높은 데다 던져서 쌓아놓은 것을. 내일 모레면 이제 가져올 건데. 미군이 포크레인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그 웅덩이에다, 세상에나, 포크레인으로 쌓아놓은 것을 다 집어 넣는 거야."

 

"어린 내가 볼 때도 진짜 눈이 뒤집혀서 뒤로 넘어가겠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짚 더미를 부둥켜 안고서 포크레인 앞에 가 가지고, 하지 말라고 그래도(…...) 미군이라고 다 피도 눈물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난 욕 나와. 그 미군 놈은 유난히 더했던 것 같아. 그 미군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랬어. 그래서 아버지가 철철 우는 것을 내가 부축해서 집으로 왔어. 그래서 우리는 거지가 됐지.” 

해가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 논밭에 피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새끼보다 더 귀하게 키운 볏단이 힘없이 쓸려 가는 걸 일개 농부가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한 가족이 겨우내 먹을 양식이 사라졌다. 농작물을 내다 팔아서 만들어야 했던 학자금은 고사하고 당장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가족의 삼시세끼가 막막해졌다.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서웠던 그날의 포크레인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아픈 기억이다. 어느새 그날의 아버지보다도 훌쩍 들어버린 나이. 하지만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60대 할머니는 부들부들 손발이 떨리는 겁 먹은 소녀가 된다. 


"나는 있잖아. 그래서 과거를, 이쪽에 대한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해. 징그러, 미군. 이거는 징그러. 왜냐면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직접적으로 포탄을 맞아서 돌아가신 거 아니지만, 우리 아버지는 사격장 이것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절절하지, 가슴 아프고 지금도."

1968년 미 공군의 육상사격장 건설을 위해 농경지를 헐값에 징발 당한 매향리 마을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작아도 자신의 농토가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이제는 사격장 철조망 뒤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려면 땅을 사용하는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나마도 폭격연습이 없는 토·일요일에만 들어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보기에는 한 없이 넓기만 했던 아버지의 땅, 아침 저녁으로 물 길어 올리는 아버지를 쭐레쭐레 따라 다니던 마을 소녀들 누군가의 아버지의 땅에는 길다란 철조망이 세워졌다. 그리고 철조망에는 매정한 푯말이 내걸렸다. “DANGER – 출입금지”.


“지금도 논길 밭둑 길을 걷다 보면 어림 잡아서 우리 논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인데(….) 진짜 어렸을 때는 끝에서 끝이 안 보였어, 그게 여기쯤이었는데. 난 그래서 가슴 아파가지고 거기 걷는 것도 진짜 가다 말다 가다 말다 해. 어렸을 때 생각이 나니까. 아버지가 그래가지고 볏짚 끌어안고 포크레인으로 그랬던(…) 나는 정말 여기 지긋지긋해, 보기도 싫어. 이쪽만 쳐다봐도 속이 아프고. 그렇지만 뭐 어떻게 해, 대항할 방법도 모르고.”

작고 어린 딸의 어깨에 기대 울던 아버지의 논에는 폭격기에서 쏘아대는 포탄을 명중시킬 표적이 세워졌다. 잘 익은 낱알이 우수수 떨어져야 할 논에는 총탄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년 농사를 위해 거름 주고 잠재워야 할 땅에는 포탄이 쿵쿵 내려앉았다. 땅을 잃고 희망을 잃은 농부의 가슴에도 포탄을 맞은 것처럼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멍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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