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성평화지킴이 Jan 23. 2019

매향리에 그들이 살았다

농부가 씨를 뿌리던 밭에 날카로운 철조망이 세워졌다. 논에서 누렇게 익어가던 벼 이삭은 포크레인에 밀려 쓰러졌다. 마을 아낙들이 새참을 이고 드나들던 논두렁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었다. 매향리 마을의 일등 일꾼이던 내 아버지의 땅에는 울타리가 쳐지고, 낯선 미군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마을 한 가운데 농토와 마을 바로 앞 갯벌을 수용해서 만들었던 매향리의 사격장, 미군들은 ‘쿠니 사격장’이라고 부르던 곳의 이야기다. 

남은 철조망

1. 

미군이 마을 앞 바다의 섬에 공중폭격을 해온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부터 농섬에 폭격연습을 하던 미군은 1950년 초반 마을 앞 해변에 주둔을 시작하더니 점차 주한미군이 사용할 폭격훈련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군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처음 징발된 땅이 21만 평. 당시 고온리라 불리던 마을의 140여 가구가 농사를 짓던 논과 밭이었다. 처음에는 예전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큰 상관 없다 여겼지만, 조금씩 폭격훈련장으로 사용하는 땅이 늘어나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농섬을 중심으로 반경 3,000피트의 바다와 갯벌, 그리고 거기에 접한 해안지역 일대 29만 평을 추가로 수용한 것이 1968년. 미군들이 ‘쿠니(KOON-NI Range)’ 라고 부르던 육상 사격장이 그 모습을 갖추게 된 시점이다. 끝이 아니었다. 1979년에는 농섬을 중심으로 반경 8,000피트까지 확장, 1980년에는 해안 지역의 농지를 추가로 징발한다. 690만 평 규모의 해상사격장과 29만 평 규모의 육상사격장, 총 719만 평 규모를 가진 아시아 최대의 공군 폭격 훈련 장소가 생긴 것이다. 

과거 육상 사격장이 들어섰던 자리

2. 

그 땅의 둘레를 따라 철조망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던 길에는 출입을 금하는 표지판이 붙여지고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원들이 보초를 섰다. 오산의 미7공군기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40.2㎞ 떨어져 있는 위치. 차로 오면 45 분 거리지만, 전투기로 날아오면 몇 분이면 닿는 곳이었다. 한번 날아오면 육상 사격과 해상 사격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최적의 훈련환경으로 꼽히면서, 하루 평균 전폭기 40여대가 날아와 14시간 동안 400여번의 폭격을 퍼붓고는 돌아갔다. 기총 사격 연습도 끝없이 이어졌다. 버젓이 사람이 살고 있지만 마을 인근 바다의 80% 이상이 모두 폭격훈련장소에 포함된 괴이한 마을. 마을의 논과 밭, 갯벌이 모두 미군의 것이었다.  

기지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헸던 정문의 경비초소. 지금은 평화를 바라는 벽화가 그려졌다.
존치 건축물이 남아 있는 미군 기지 내부

그 철조망 안에는 이제 씨를 뿌리던 농부 대신 미군이 살았다. 2005년 폐쇄될 때까지 54년 동안 미국의 태평양 미공군사령부 산하 대한민국 주둔 제7공군 소속의 미군 전용 폭격장소였다. 오산 공군기지에서 날아 온 전투기가 폭격연습을 하면 그 실력을 채점하고 평가해서 보고하는 것이 이 곳의 주요 역할이었다. 그 사격장 운영을 책임지는 대대장과 채점관들이 상시 대기를 하던 장소다. 넓은 부지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격장에 설치된 표적을 맞추고 돌아가는 전폭기가 주요 방문객이었기에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은 십 수명에 불과했다. 사격장에 근무하는 미군들이 요기를 할 수 있는 식당과 바가 있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동료들과 즐길 수 있는 당구장과 실내농구장도 설치되었다. 한때 미군부대를 따라 흘러 다니던 여인들을 기지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함께 춤을 추던 댄스홀도 있었다. 매향리 속의 작은 미국 마을이었다.  

사격장 운영을 책임지는 대대장의 사무실 등이 있던 행정 건물의 복도
대대장 숙소의 화장실, 보일러 시설이 남아 있다

3. 

그 중심에는 관제탑이 있었다. 3층으로 된 사격통제소, 즉 관제탑은 전폭기들의 사격 현황을 관측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폭기들의 주요 목표물이었던 농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이 부대의 핵심임무가 사격훈련이었던 만큼 업무 대부분이 관제탑에서 이루어졌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된 삼층에서 통제관이 비행기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관제를 하면, 그 아래 이층에서는 채점원들이 채점 장비로 채점을 하고 맨 아래층에 있는 통신 장비로 보고를 했다. 당시 미군들이 바쁘게 오르내리던 계단부터 사격장을 내려다보던 각진 유리창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쿠니사격장 사격 통제실은 2016년 6월 ‘경기도 제1호 우수 건축자산*’으로 등록되었다. (*건축자산은 1876년 개항기 이후부터 1970년대 산업화 시기까지 지어진 건물과 교량 등 건축물 중 예술·역사·경관·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을 뜻한다.)

관제탑
사격통제실에서 바라본 육상 사격장 전경

관제탑 바로 옆에 남아 있는 헬륨 가스실은 사격 훈련장의 필수 시설 중 하나였다. 그날 그날 달라지는 기상 상태에 따라 훈련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가 정해지기 때문에, 부대원들은 헬륨 가스를 넣은 고무풍선으로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해야 했다. 관제탑 바로 아래 내무반에는 대원들이 상주하며 시간마다 아니면 때때로 기상 변화가 있을 때마다 바로 알리며 폭격 훈련을 지원했다. 

헬륨 가스 저장소

땅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던 철조망 안을 마음껏 뛰놀던 개도 한 마리 있었다. 기지에 사는 미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쿠니사격장의 공식 마스코트 ‘제이미 Jamie ‘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살다가 부대 안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그리고 그 철조망 너머 마을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전폭기의 굉음과 폭격 소리를 들으며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철조망에서 한 뼘도 안 떨어진 땅에, 총탄이 아슬아슬 스쳐가는 사격 표지판 바로 옆에, 움직이는 표적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었다. 

쿠니 사격장의 마스코트 견, 제이미의 무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아버지의 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