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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Jan 24. 2019

목숨을 걸어야 사는 삶

마을로 들어가는 큰길 어귀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다. 매향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신작로가 이 가게 앞을 지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필요한 새로운 물건들은 이곳에서 먼저 내려졌고,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이곳부터 먼저 들렀다. 집집마다 외상장부를 달아 놓고는 물건을 가져다 쓰던 시절, 매향리 사람들이 버는 돈은 모두 이 집으로 모여든다고 할 만큼 장사가 잘 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누구나 자동차를 몰고 찾아갈 수 있는 대형매장이 지척에 생겼고, 인터넷으로 클릭 몇 번만 하면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가게에 남은 외상장부는 근처 공사현장의 인부 몇 명이 달아 놓는 소주 값과 담뱃값뿐이다. 이곳을 45년째 지키고 있는 할머니는 이제 화석처럼 가게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먼지 쌓인 물건들과 함께 남았다. 


1. 가게로 사람들이 총알을 가지고 왔다. 

저녁밥상에 오를 두부와 콩나물을 팔고 아이들 눈이 똥그래질 눈깔사탕도 팔던 1970년대 당시의 가게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었다. 참새 방앗간 들 듯 드나들던 가게로 사람들은 탄피를 주워 왔다. 각자 주어 온 탄피에 따라 무게를 달아서 가게에다 모아 놓으면 고물상이 수거해갔다. 그 탄피 값으로 받은 돈은 보리쌀 한 됫박 팔아먹을 돈이 되기도 하고, 머리 큰 남학생들이 엄마아빠 몰래 술 한 병 사 먹을 돈이 되기도 했다.  


"여기 (양명중)학교에 학생이 150여명 있었죠. 낮에는 공부를 해도 저녁에는 사격을 안 하니까, 탄피가 논으로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그걸 주워다가 팔고 그런 장사를 했어요. 내가 사가지고 고물장사한테 내가 넘겼던 거야. 고물장사는 그걸 죄다 모아서 팔고(….) 요거 하나에 75원이었어요. 그럼 그 사람들(고물장사)은 100원은 받는 거야. 신주(구리)거든." 


처음에는 동네 아이들의 장난이었던 탄피 줍기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른들까지 탄피 줍기에 합세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탄피 줍기’라는 직업이 쿠니 사격장 옆에 살던 마을 주민들에게 생겨난 것이다. 미 공군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로 평일에만 사격 훈련을 했고, 먹고 살기 힘들었던 주민들은 사격 훈련 후에 떨어지는 탄피들을 주어다가 고물상에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위험한 전쟁 연습장이었던 사격장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소중한 일터가 되었다. 쏟아지는 총알이 금싸라기처럼 보이던 나날이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비행기가 오는 걸 반겼지. 기관총을 쏘거나 폭격을 하거나 하면 탄피 이런 걸 주어 가지고 팔아서 돈을 버니까. 여기 마을 사람들이 그런 고철을 주어다가 팔아서 생계 유지를 하면서… 그렇게들 살았어요.”


2. 탄피 줍기가 마을의 미션이 되었다

그렇게 전쟁 같은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 가는 방법을 발견해 냈다. 농사 지을 땅 대신, 조개 캐러 갈 갯벌 대신 새롭게 생긴 밥벌이였다. 땅에 박힌 탄피를 캐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힘 좋은 동네 젊은이들도 나섰다. 고철 탐지기를 사다가 탄피를 탐지하는 이들도 생겨날 만큼 경쟁이 치열해졌다. 다들 폭격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폭격이 멈추는 순간 탄피가 떨어졌을 만한 지점으로 재빨리 가야 했다.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먼저 도착해서 찾아 낸 사람이 비싼 탄피의 임자였다. 점점 잘 달리고 힘 센 남정네들이 탄피 수집을 독식하게 되었다.  


“저기 언덕에서 어디에 포탄이 떨어지는가는 쭉 보고 있는 거지. 그렇게 딱 보고 있으면 대충 어디쯤에 탄피가 있을 지를 알거든. 비행기에서 사격할 때도 딱 움직이는 선이 있으니까, 그걸 알고 가서 캐내는 거지. 이렇게 (땅에 깊이) 박혀 있으면 그걸 캐내야 되거든.”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과해지자 탄피 줍는 조를 정하자는 대안까지 나왔다. 마치 조개를 캐는 갯벌을 마을 단위로 나누듯, 요일에 따라 마을 별로 조를 편성하고 순번을 정해서 탄피를 수집했다. 자기 마을의 조가 탄피 줍기를 하러 가는 날이면, 저녁밥부터 일찌감치 해 먹고는 사격장에서 빨간 깃발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빨간 깃발이 올라가면 폭격 시작, 빨간 깃발이 내려오면 폭격 종료. 온 마을 사람들이 빨간 깃발의 지시에 따라 생활 시간과 활동 반경을 정하는 것이 점점 당연해졌다. 온 마을 사람들이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총알만 보고 사는 요상한 마을이 된 것이다. 


“사격장 안에 탄피가 떨어지는 건 동네사람들이 같이 주워가지고 나눠 가졌어요. 매향 1리가 3개 조 매향 2리가 2개조 이런 식으로 나눠서. 여기 학교(양명 중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생들도 1개 조를 해서 그 돈을 벌 수 있게 해준 거지. 빨간 기가 내리면 그때부터 뛰기 시작하는 거에요. 뛰어가서 탄피를 주어다가 한 되당 팔면 조장이 돈을 주지.”


3. 그 총알을 줍기 위해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다


탄피의 종류에 따라 받는 가격도 달랐다. 1970년대 기준으로 기관포 탄피가 10Kg에 1400원 정도. 양은처럼 값이 나가는 재질은 가격을 더 쳐주었고, 폭탄에 붙어 있는 구리 재질의 값이 제일 많이 나갔다. 쌀 80Kg 한 가마니가 6800원쯤 하던 시절이니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떤 이들은 폭탄이 떨어져 불바다가 된 농섬까지 들어가서 기다렸다. 폭격기가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인데도 몰래 들어가서 지키고 있다가 폭탄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폭탄이 떨어지기만 하면 몸이 푹푹 빠지는 뻘에도 들어갔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닷물로도 들어갔다. 남들보다 한발 먼저, 폭탄이 떨어진 갯벌에 닿기 위해서였다. 조별로 탄피 작업을 하러 간 사람들이 줍고 남은 것을 건지기 위해 사격장 철망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밤을 새우다가 경비원들과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탄피를 두고 벌이는 생존의 싸움이었다. 


“이게 흙 속에 배기니까(박혀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다 찾아요? 못 찾지 다. 그렇게 못 찾은 거를 주우려고 들어가는 거지. 그러다가 불발탄이 나오면 미군들한테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이걸 직접 분해해. 그래서 가져다 파는 거지. 이걸 잡으려고 경비원들이 다니고 그랬지.” 


“어릴 때부터 동네 아이들이 (불발탄을) 주워다가 가지고 다녔으니까. 서로 주어 온 거 따먹기도 하고. 뻘에 들어가서 주워다가 이걸 까는 거지. 그러면 그 안에 구리가 나오니까, 그걸 까서 따로 팔고. 그러다 보면 사고도 나는 거지.” 


불발탄을 주워서 터뜨리거나 돈을 더 받기 위해 해체하는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일이었다. 뇌관을 건드리지 않고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분해하는 건 동네 꼬마들도 어려서부터 터득한 기술이었다. 불행히도 완전한 행운은 이 마을에 없었다. 불발탄이 터지면서 마을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수거한 불발탄으로 장난치던 아이들도 죽었다. 물론 죽음은 모두에게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굶어 죽으나 사고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배고픔은 두려움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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