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
자의반 타의반.
나에게는 추억이 담긴 내 공간이 없다.
7여 년 간 이어진 워홀 생활이 화근이었다고 할까.
일 년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는 탓에 한국에서의 내 공간이었던 부모님 댁의 내 방은 이미 창고로 변해버렸고, 그곳에 있는 거라곤 내 이름 석자가 적힌 사과박스 안에 담긴 책 몇 권과 어린 시절의 사진들과 손편지들 뿐.
처음 워홀을 시작했을 때는 이민가방도 모자라 한국에서 택배로 짐을 받을 만큼 그 양이 굉장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양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봄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옷들을 포함해 직업적 물품인 셰프복과 칼 등을 포함한 잡다한 걸 다 합쳐도 캐리어 무게 포함 25kg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내 물욕이 줄어든 걸까? 여전히 각종 SNS 광고만 보면 눈 돌아가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마 편의에 의한 미니멀 라이프가 나도 모르게 시작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집', 혹은 '내 물건 혹은 추억들을 적제 해둘 수 있는 공간'이 있던 시절,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둘씩 사모으는 재미를 느끼곤 했지만 지금은 그게 모두 짐이라는 생각이 들어 들었다 놨다 반복하다 결국은 내려놓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당장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면 과감하게 내려놓곤 한다.
내 공간이 어디에 있다는 건, 소유에 대한 집착이 되는 시발점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단순하고 명확해졌기에 그와 함께하는 내 삶도 간편해진 게 아닐까.
처음 몇 년은 내 추억을 쌓아둘 공간이 사라졌음에,
주거지를 옮길 때마다(나라를 옮겨다닐 때마다) 내 동네라고 생각했던 곳들이 스쳐 지나간다는 우울함,
내가 속한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외로움, 속상함이 내 머릿속과 마음속을 지배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다.
내가 애써 지켜내야 할 것도 집착할 것도 없는,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생활 방식.
이로 인해 내 삶은 오히려 더 풍요로워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언제든 캐리어 하나만 들면 내 삶을 옮길 수 있으니까.
새하얀 셰프복과 칼 한 자루만 있으면 세계 그 어디에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내 직업도 한몫했으려나.
물건, 사람, 직업 혹은 또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내 인생은
'내려놓음'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세상에 향해 가슴을 더 크게 내밀 수 있었다.
그 언젠가 읽었던 '무소유'의 깨달음이 바로 이런 걸까.
내려놓음으로 더 많은 것들을 얻어가는.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또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는 그런 재밌는 세상 속에서 오늘도 숨을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