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불가' MC 신동엽도 어쩔 수 없는 시청률
어린 시절, 나의 영웅은 신동엽이었다. 맞다, 그 개그맨 신동엽. 화려한 입담과 능청스러운 연기력을 갖춘 그는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대마초 흡입, 톱 모델과의 열애, 사업 실패는 신동엽을 따라 다니는 키워드가 됐지만, 그것조차 그는 개그의 소재로 웃어넘긴다. 신동엽은 개그맨으로서 MC로서 확고한 자신만의 스타일과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차분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와 상대방의 말을 재치 있게 받아치는 애드리브는 그의 전매특허다. <해피 투게더>의 깔끔한 MC 진행과 <헤이 헤이 헤이>의 꽁트 코미디 그리고 <남자 셋 여자 셋>에서 보여준 시트콤 연기까지. 그는 단순히 개그맨을 넘어선 엔터테이너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어린 시절의 영웅, 신동엽을 만나다
EBS <다큐 프라임>을 떠나, 새롭게 옮긴 프로그램은 SBS <신동엽의 300>(2009년 10월 5일 첫방송)이었다. 시청자 300명과 사회적인 이슈들을 앙케이트 형식으로 풀어보는 퀴즈쇼였다. 당연히 300명의 시청자를 섭외하고, 퀴즈를 내는 것이 업무의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영웅, 신동엽과의 잊지 못할 첫 만남.
"오빠! 막내가 오빠 엄청 좋아한대. 진짜 팬이었다는데?"
"어... 그래."
소파에 누워있던 그는 쑥스러운 듯 몸을 반대로 돌리면서 건성으로 웃어넘긴다. 프로그램의 메인 MC인 그와 막내작가인 나는 별로 마주칠 기회가 없었고, 그저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였다. 녹화 전날, 방송 대본과 퀴즈 문제를 인쇄하느라 정신없는 내 어깨를 감싸는 손. 담당 피디 H 였다.
"음... 이제 대본 더 안 뽑아도 될 것 같다."
"네? 아직 3부 밖에 안 나왔는데요."
대답을 듣고, 한참 말이 없던 피디는 계속해서 대본을 뽑는 나에게 제안한다.
"대본 그만 뽑고, 커피 한 잔 할래?"
그때는 정말 몰랐다. 대본을 더 이상 뽑지 않아도 된다는 게 바로 프로그램의 '종영'을 의미한다는 것을. 피디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눈치 없이 계속 대본을 뽑았던 것이다. EBS에서 SBS <신동엽의 300>으로 프로그램을 옮긴 뒤,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피디 H를 따라 <SBS 스페셜>로 가게 되었다.
마지막 회식 날, 분위기는 굉장히 우울했다. 정작 신동엽과 연기자들은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본 것처럼 태연했고, 오히려 제작진들을 격려했다. 회식이 점점 마무리가 될 무렵, 누군가 어깨동무를 하며 장난을 걸어온다. 신동엽이었다.
"너, 형 좋아한다며? 사진 한 번 찍어야지."
내 이름을 기억하는 그가 고마웠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 KBS 연예대상 대기실 복도였다. 화려한 무대와는 달리 KBS 공개홀 대기실 복도에는 프로그램 제작진부터 출연자와 매니저, 스타일리스트까지 몰려있어 정신이 없었다. 복도 끝에서 깔끔한 수트 차림으로 걸어오는 신동엽.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도 나의 눈을 정확히 맞추며 웃어보였다.
'아, 아직 나를 기억하는구나.'
내 착각이 부끄러움으로 바뀌는 데는 불과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무대로 올라가는 긴 대기실 복도의 모든 사람들과 일일이 안부 인사를 나누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복도를 가득 채운 피디와 작가 그리고 방송 스태프는 신동엽과 오랜 시간 함께 일했거나, 현재 일하고 있고, 또 일을 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최고 MC인 신동엽이 몇 달 함께 했던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치열하고, 냉정한 곳이다. 한 달에도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첫 방송, 혹은 마지막 방송을 한다. 긴 대기실 복도를 가득 채운 피디와 작가들. 소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진이다. 방송이 끝나면 그들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바로 시청률이다. 매일 아침마다 그 시청률 하나에 울고 웃는다. '울고 웃는다'는 표현이 워낙 관용적이라, 자칫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심각하다.
시청률은 프로그램의 생존을 결정한다. 시청률이 낮다는 것은 광고가 잘 붙지 않는다는 것이고, 시청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방송국은 대중성과 수익 측면에서 가치가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오래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낮은 시청률이 계속 되면, 곧바로 그것을 대체할 파일럿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기존의 제작진을 교체한다.
애초 <신동엽의 300>은 매주 월요일 오후 10시에 방영되었다. 동시간대 경쟁프로인 <가요무대>와 드라마 <선덕여왕> 등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방송 시간을 옮겼으나 역시 그 시간대의 경쟁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과 <출발 비디오 여행>에 밀렸다. <전국노래자랑>은 두 자릿수 시청률을 놓친 적이 거의 없는 장수 프로그램. <신동엽의 300>의 조기종영에는 이런 배경도 작용했을 터다.
일정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종편과 케이블 채널이 워낙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시청률이 집계되는 본 방송대신 스마트폰이나 PC를 통해 시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다 괜찮은 것일까? 아니다. 시청률이 아무리 높아도, 상대적으로 장년층 시청자가 많은 프로그램은 광고가 잘 붙지 않는다.
방송의 생존을 결정하는, 단 4000여가구의 시청자
2049 타깃 시청률이라는 게 있다. 20대부터 40대 시청자들이 보는 프로그램의 파급효과가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2049 시청자들은 트렌드와 이슈를 만들고, 실질적으로 광고사의 제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방송국뿐만 아니라 광고주들에도 환영을 받는다. 그래서 최고 수준이라는 1300만 원 이상의 SA급 광고들이, 시청률이 최고는 아니지만 시청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는 <무한도전>과 인기 드라마에 방송되고 있는 것이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프로그램일수록 생존 확률이 높은 것은 변함이 없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은 물론이고 제품을 판매하는 광고주 그리고 시청자들까지 좌지우지 하는 시청률은 어떻게 집계하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1992년부터 피플미터라는 장치를 통해 시청률을 집계하고 있다. 각 가족 구성원에 해당하는 리모컨 버튼이 있고, TV를 볼 때 자신의 조건에 해당하는 버튼(가령 40대 남자)을 눌러야만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플미터를 통해 시청률 조사에 참여하는 시청자들은 몇 명일까? 방송의 생존과 광고의 판매를 결정하는 시청집단은 현재 약 4000가구다. 유선 전화가 있는 시청자를 무작위로 선정해 동의를 구하고 피플미터를 설치하는 것이다. 당연히 누가 선정되었는지는 극비 보안 사항으로, 방송 관계자들의 로비를 사전에 차단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니혼 TV 피디가 시청률 조사 가정을 금품으로 매수해서 구속이 된 경우도 있었다.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이 방송할 시간이면 거리의 자동차와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말 그대로 본방사수의 시대였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시청 패턴과 방송 매체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본 방송이 끝나고 몇 시간만 지나면 VOD와 PC를 통해 재방송을 바로 시청할 수 있고, 스마트폰으로는 언제 어디서든지 방송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방송과 시청자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시청률 조사 방법은 90년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시청률과 관련해 조사 대상의 대표성과 관리, 산정 방식의 문제 등이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유선 전화가 없는 1인 가구의 시청자, 스마트폰과 PC를 통해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시청률 집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프로그램의 시청률과 대중의 체감 시청률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문제점은 단순히 시청률 조사 대상과 방식에만 있지는 않다. 현재의 시청률 집계 방식으로는 집안의 리모컨 선택권이 있는 중장년층 대상 프로그램과 몇몇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방송국은 당연히 시청률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야한다. 따라서 다큐멘터리와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이 나오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최근 방통위가 시청률 조사 방식의 개선에 관심을 보이면서 통합시청률 조사 등 새로운 시청률 집계 방식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프로그램 방송에 대한 시청률을 TV, PC, 모바일, VOD로 합산해서 집계하는 것은 아직까지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물론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는 아니다. 여전히 대중적인 영향력이 가장 큰 지상파 방송국들은 시청률 개선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현재는 지상파 시청률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보이고 있지만, 통합 시청률이 도입될 경우 종편, 케이블 등 다른 사업자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개그맨은 신동엽이다. 신동엽은 현재 예능 MC들 중 가장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SNL 코리아>와 <마녀사냥>, <안녕하세요>에서 보여주는 그의 코미디 본능과 MC 진행은 전보다 더욱 진화했다. 신동엽 외에는 대체불가해 보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작가로서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프로그램의 기획과 제작을 위해 방송국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것이 시청률 집계에 참여하는 단 4000여가구의 시청자만을 위한 노력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