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세번째
바다 뷰...바다 뷰... 이제 슬슬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지겨워졌을 것이다. 파도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때쯤 멋진 정원과 독특한 인테리어로 눈을 정화할 수 있는 색다른 카페들이 있다.
보롬왓은 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식물 체험 공간이다. 성인은 4,000원의 입장료가 있고 내부의 작은 카페에서는 음료도 따로 시켜야 한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정원과 탁 트인 풍경을 보면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정원이 꽤 커서 가볍게 산책을 했는데 1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카페를 가지 않고 정원만 구경해도 괜찮지만, 날씨가 좋다면 음료를 한잔 시켜 카페 앞 쿠션에 누워 제주의 하늘 품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좋다.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있는데 가장 넓은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메밀꽃이다. 5~6월과 9~10월에 이곳을 방문하면 초원에 눈이 내린듯한 넓은 메밀꽃밭을 볼 수 있다.
'미쁘다'는 '믿음직스럽다'의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미쁜 제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한 상호에 걸맞게 전통의 멋을 담은 한옥 카페이다. 미쁜 제과를 검색해보면 맛있는 빵으로 유명한 곳임을 알 수 있는데 나는 무엇보다 옛 감성을 지닌 고즈넉한 정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음료를 주문하고 밖으로 나가면 바다를 마주한 넓은 정원을 볼 수 있다. 잔디가 가지런하고 잘 꾸며진 수로에 돌다리도 놓여 있어 집주인의 정성이 느껴졌다. 정원 안쪽의 원목으로 된 정자와 높은 그네는 예스러운 느낌을 더 자아냈다. 게다가 곳곳의 고급스러운 정원수들과 돌 조형물이 옛 사극에 나오는 대감집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하이앤드 제주', '몽상드애월' 등 인기 카페가 모여있는 애월 카페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 쓸쓸히 서 있는 '레이지 펌프'라는 카페가 있다. 이곳은 한때 양어장으로 물을 긷던 펌프장을 개조해 카페로 만들었다고 한다. 외관은 예전 펌프장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 허름해 보이지만, 반전의 내부를 가지고 있다. 카페는 층마다 다른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데 1층의 주문대에서 한 계단만 내려가면 반지하의 몽환적인 공간을 볼 수 있다. 벽에는 빔프로젝터가 쏘아지고 있고 붉은 조명과 힙한 소품들은 누군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워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2층은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으로 특별한 장식 없이 노출 콘크리트와 실용적인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3층은 해수를 보관하던 장소였다고 하는데 예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몇 개의 의자와 탁자만이 놓여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낸 통창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변형도 주지 않은 듯 콘크리트 벽에는 따개비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붙어있었다. 오래된 공간에 앉아 옛 모습을 생각해보게 하는 멋진 장소였다.
사계 생활은 20년 넘게 농협으로 쓰이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는 음료를 마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제주 작가들의 작품과 제주를 소재로 한 굿즈도 만나볼 수 있다. 현금입출금기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진짜 농협에 왔는지 헷갈릴 정도로 재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은행 전체를 개조해서 그런지 어색하게 꾸며 놓은 테마 카페들과 차원이 달랐다. 카운터는 은행 창구 느낌을 그대로 살려놨고 음료를 주문하면 은행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번호표를 받아 볼 수 있다. 금고 공간은 제주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탈바꿈했고 지점장실은 은밀한 대화를 원하는 한 팀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2층은 마치 주주총회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했는지 어떤 카페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색다른 구조였다. 옥상에 가면 쌓여있는 팔레트와 오래된 시외버스터미널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자 의자가 있는데 예전에 얼마나 많은 직원분이 이곳에서 믹스커피와 담배로 직장의 애환을 날려 보냈을까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게다가 옥상에서 볼 수 있는 선명한 산방산 뷰는 덤. 이곳은 부모님과 함께 오면 옛 생각에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았다.
관광업이 성행하기 전 제주도는 넓은 바다와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일차 산업이 발달했었다. 이에 따라 섬 곳곳에 작물을 저장할 농수산물 창고가 생겼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없어지거나 안 쓰는 창고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버려진 창고를 개조해 사장님의 감성을 가득 채워 카페로 재탄생시킨 공간들이 있다.
카페 공백은 수산 창고를 미술관 느낌의 카페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BTS의 멤버 슈가의 형이 운영하는 카페로 더 유명한 이곳은 BTS 팬클럽 '아미'의 필수 관광 코스라고 한다. 처음 가면 주차장 규모에 한번 놀라고 입구에 들어서면 이곳이 창고였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세련된 내부에서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밖에서 보면 작은 단층의 카페로 보이지만 주문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면 넓은 메인 공간을 볼 수 있다. 좌석이 등받이가 없이 S자 모양의 곡선 형태로 되어있는데 오래 앉아 음료를 마시기에는 조금 불편했다.
멋진 바다 뷰에 이끌려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가니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길을 따라 옆 건물의 전시관으로 갈 수 있었는데 마치 미술관에 온 기분이 들었다. 예술품에 조예가 없어 큰 감흥은 없었지만, 전시관에 나오는 노래와 분위기가 재미있었다. 공간 곳곳에 매력이 숨어있어 누군가와 함께 이곳에 온다면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
제주의 특산품인 귤을 보관하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도 있다. 바로 크래커스 대정점이다. 크래커스는 제주에 한경점과 대정점 두 군데가 있는데 사뭇 느낌이 다르다. 나는 대정점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는데 카페의 외관은 마치 고인돌처럼 매우 단단해 보여 태풍이 와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반전으로 보물이라도 보관해 놓은 것 같은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드럽고 따뜻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조명을 최소화해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카페의 주 조명이 되어주었고 적당한 어두움은 눈을 편하게 해 주었다. 거기에 돌벽을 따라 줄지어 있는 식물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왠지 모르게 차분해져서 사람도 없었는데 친구와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속닥 이야기했다. 비가 오거나 구름이 많이 낀 어두침침한 날의 분위기가 궁금해 그때 꼭 다시 방문해보고 싶은 카페이다.
SNS 업로드를 자주 한다면 꼭 방문해야 하는 카페가 있다. 바로 아줄레주와 카페 덴드리이다. 제주도에서 잠시나마 유럽의 감성을 느껴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다른 제주 사진 스폿과 차별화된 예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아줄레주는 '광택을 낸 돌멩이'에서 유래한 말로 포르투갈 도자기 타일 작품을 뜻한다고 한다. 제주도의 작은 리스본을 모토로 한 이 카페는 에그타르트가 유명하다. 나도 그 맛이 궁금해 에그타르트를 먹어보려고 방문을 했었는데, 에그타르트보다 독특한 타일이 있는 건물에 더 반하게 되었다. 건물이 이국적이라 왠지 제주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카페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있는데 주변 풍경과 함께 마치 유럽의 한 작은 도시에 있는 성당 같았다. 내부에는 벽마다 작은 창을 만들어 놓았는데 특별한 뷰는 없지만, 자리에 앉으면 멍하니 밖을 보게 되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곳이었다. 에그타르트는 오븐에서 나오자마자 김이 솔솔 날 때 먹어서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덴드리는 그리스식 건축 형태로 지어진 카페로 파랗고 하얀 외관이 옛날 포카리스웨트 광고에서 봤던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떠오르게 했다. 카페는 넓은 귤나무밭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마치 지중해의 오렌지 나무로 둘러싸인 유럽의 가정집 같기도 했다. 귤나무 사이사이에는 야외 좌석도 있어서 귤이랑 사진도 찍고 질리도록 시간을 보내기에 좋을 것 같았다. 카페 내부에는 거대한 창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통해 보는 귤밭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요즘 카페는 창을 정말 잘 내는 것 같다고 새삼 느꼈다. 제주에서 잠시 그리스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가 보자.
이렇게 많은 카페를 다니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내가 커피를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카페인이 몸에 잘 받지 않아 이른 오전이 아니면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게다가 커피 맛도 고소한 것과 시큼한 것 정도밖에 구별 못 하고, 카페에 가면 커피보다 주로 티나 초콜릿 라떼 같은 달달한 음료를 시키는 카페인 찌질이이다.
제주에 커피가 맛있다고 유명한 집들이 많은데 나는 커피를 잘 마시지 못해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카페에 얽힌 이야기 때문에 그 맛이 궁금해서 찾아가 본 카페가 두 곳이 있다. '나비 정원'과 '풍림 다방'이라는 카페이다.
'나비 정원'은 서태지 씨의 단골 카페로 제주도에 오면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한 번씩 들렀다 가는 곳이라고 한다. 얼마나 맛있으면 공항에서 한참 먼 시골인 서귀포 모슬포항까지 와서 커피를 마시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곳은 기계가 아닌 손으로 물을 부어가며 걸러 먹는 핸드드립 커피가 유명하다는데 핸드드립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나비 정원이 있는 모슬포항은 관광지로 아직 발달하지 않아서 예스러운 항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카페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으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마치 친구 집에 놀러 온 것 같았다. 핸드드립이라 그런지 커피를 내리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잠시 동네를 산책하고 오니 커피가 나와 있었는데 첫인상은 일반 커피보다 뭔가 맑고 고와 보였다. 잔뜩 기대한 채로 커피를 한입 마셨는데 역시나 였다. 커피 맛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는 일반 프랜차이즈 커피와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카페인은 알차게 들어 있었는지 이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카페에 특별한 볼거리가 있진 않아서, 커피를 잘 알고 오롯이 커피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제격일 것 같다.
'풍림 다방'은 수요 미식회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커피집으로 '풍림 브레붸'라는 바닐라 크림이 듬뿍 올라간 비엔나커피를 시그니처 메뉴로 하고 있다. 동쪽의 작은 송당리라는 마을에 위치한 이 카페는 제주에서 대기가 가장 긴 카페가 아닐까 싶다. 카페에 좌석이 많지 않고 시그니처인 '풍림 브레붸'가 TAKE OUT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는지 주변에 소품 숍 같은 상점들이 생기고 마을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고 한다.
풍림다방을 처음 방문한 날, 이번에는 밤을 지새우지 않기 위해 나는 '풍림 브레붸'와 같은 크림이 올라간다는 핫초코인 '쇼콜라쇼'를 시켰다. 시그니처 메뉴가 아니라 걱정도 됐지만 '쇼콜라쇼'는 기대 이상이었다. 바닐라 크림이 많이 달지 않아서 초코와 잘 어울렸고 차가운 크림이 먼저 입속에 들어온 뒤에 따뜻한 음료가 얹히는 느낌이 좋았다. '풍림 브레붸' 맛도 궁금해 친구의 것을 조금 먹어 봤는데 크림이 맛있어서 그런지 커피의 쓴맛이 거의 나질 않았다. 꾸덕하고 진한 크림은 빵에 찍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았다. 수제 크림을 올려 비엔나커피를 하는 곳이 제주에도 많이 생겨서 대기를 꺼리는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지만 꾸덕꾸덕한 크림과 핫초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대기를 뚫고 가볼 만한 곳이다.
이 외에도 코리아 바리스타 챔피언십 1위에 입상하신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트라인 커피', 강원도 강릉 시골에서 시작해 오직 커피 맛과 입소문으로 성공한 '테라로사' 등등 유명한 커피집이 많기 때문에 커피깨나 마셨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제주에서 최고의 커피 맛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많은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카페에서 미술관을 보았다. 커피 한잔의 입장료를 내고 카페 사장님의 감성과 철학을 구경한달까? 카페는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말한다. '너 앉아서 책 읽어.', '이쪽에 앉아서 바다를 봐.', '여기서 사진을 찍어.'. 사장님에게 물어보거나 이야기하지 않아도 의자와 탁자의 배치나 소품들에서 그 마음이 전달된다. 학창 시절 대학 입학을 위해 언어 시험을 대비해 공부할 때가 떠올랐다. '시를 읽고 ~부분에 화자가 의미한 바를 유추해 내시오.'. 카페에도 곳곳에 이러한 문제가 숨어 있다.
보통 인테리어 소품용 책을 둔 카페에는 자기계발서나 여행에 관련된 책 등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갔던 한 카페는 특이하게 '건축의 이해', '어디서 살 것인가?', '건축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왜 이런 책을 두셨을까? 혹시나 해서 직원분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사장님이 건축가시고 직접 건물을 지었다고 했다. 작은 힌트로 나는 카페의 사소한 공간까지 눈여겨보게 되었고 곳곳에서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았다.
일인 석이나 자리를 많이 띄어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어 둔 카페에 가면, 사장님이 왠지 상대방과의 대화나 개인의 시간을 존중해주시는 분일 것 같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털스웨터를 입은 채 나긋나긋 주문을 받는 사장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사장님도 다른 카페에 가게 되면 이러한 곳을 찾아다니시지 않을까? 혼자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우연히 찾아간 카페에 손님이 나밖에 없다면 사장님께 가볍게 물어보자. '인테리어가 정말 예쁜 거 같아요. 어떻게 이런 카페를 차리게 되셨어요?'. 웃으며 사장님이 답변해주신다면 그날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작가에게서 1:1로 작품의 해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에 가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작은 소품에서부터 사장님의 의도나 취향을 생각해본다면 더 즐거운 카페 투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