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첫번째
요즘 인터넷이나 책을 보다 보면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인생(人生)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 사람이 살아 있는 기간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인생'이라는 단어를 접두사처럼 써서 인생 맛집, 인생 카페, 인생 술집 같은 표현을 만들어 '내가 살아 있는 기간 중 최고의 맛집'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한다. 나는 제주에서 인생 카페를 찾았다.
처음엔 그토록 육지만 바라던 나에게 제주에 살면서 나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쉬는 날 날씨가 좋으면 집에 가만히 있질 못하는 것이다. 시내를 벗어나 어딘가를 가지 않으면 하루를 버린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 10분만 나가면 바다를 볼 수 있는 생활을 언제 또 할 수 있을까 싶어 제주를 떠나기 전까지 눈에 최대한 많이 담고 싶었다. 이렇게 빠릿빠릿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중간중간 핸드폰을 충전하거나 목을 축이러 카페를 많이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잠깐 쉬었다가 가려고 했지만, 어떤 카페에서는 멋진 인테리어와 창문 밖 전망을 보고 있다 보면 2~3시간이 훌쩍 가버리기도 했다. 이런 카페들을 몇 군데 경험하고부터 나는 카페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이때부터 잠시 쉬어가는 경유지가 아닌 목적지로 다양한 카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렇게 방문한 카페가 어느새 100여 군데가 넘는다는 것을 책에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육지에 있을 때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나 프랜차이즈 카페를 주로 가던 내가 어떤 곳들을 가고 카페 덕후로 변하게 되었는지 하나씩 소개하겠다.
지도에 방문했던 장소들을 하나씩 찍다 보니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카페를 많이 다니다 보니 내가 어떤 카페를 좋아하는지 나의 취향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규모가 적당히 있으면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가 제일 좋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사진 포인트를 만들어 놓은 곳보다 인테리어가 단순해도 따뜻한 나무나 세련된 가구들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을 선호한다. 제주도에는 이러한 카페가 너무 많지만, 그중에 바다 뷰가 유독 좋아 기억에 남는 5개의 카페가 있다.
허니문하우스와 원앤온리는 서귀포의 핫플레이스다. 오직 카페를 보기 위해 서귀포에 가도 될 정도로 육지에서 보기 드문 개성을 가지고 있다. 허니문하우스는 2018년 파라다이스호텔 부대시설 일부를 카페로 재단장해 오픈한 곳이다. 호텔의 진입로를 이용해 카페로 들어가게 되는데 90년대 최고의 호텔이라는 명성답게 입구부터 야자수가 즐비해 마치 외국 휴양지에 온 느낌을 받았다. 노후가 지속되어 호텔 본건물은 사용하지 않지만, 카페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지중해풍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건축물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원앤온리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멋진 루프톱 뷰를 가지고 있다. 1층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뒤로는 산방산, 앞으로는 끝없는 바다를 볼 수 있다. 카페 마당은 해변과 연결돼 있어 프라이빗 비치를 가진 동남아 리조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별한 인테리어는 없지만 마당의 야자수와 바다, 산방산이 최고의 장식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너무나 유명해서 항상 사람이 많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산과 바다 전망이 있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날은 꼭 한번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울트라 마린과 휴일로, 아오오는 모던한 인테리어에 멋진 바다 뷰를 가지고 있는 카페들이다. 모두 내부가 넓고 벽은 거대한 통유리로 둘려 카페에 바다를 담고 있다. 베란다나 마당이 있어서 더 선명히 바다를 보기 위해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게다가 카페들이 각각 동, 서, 남쪽에 있어 모두 다른 바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주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한다면 모두 방문하며 서로 다른 바다의 풍경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처음 울트라 마린 카페에 갔을 때 밖에서 보이는 녹이 슨 간판을 보고 '조금 낡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외관과 다르게 내부가 정말 넓고 깔끔했다. 그리고 밖에서 보면 단층 카페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와 더 가까운 1층이 있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카운터 뒤편에는 거대한 나무 선반이 있는데 원목 가구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거기다 청록색의 쿠션과 스탠드 등으로 곳곳에 포인트로 줘서 겉모습과 다르게 세련돼서 깜짝 놀랐었다. 좌석들도 여러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단체로 온 여행객도 부담스럽지 않게 머물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는 SNS에서 핫한 멋진 사진 포인트도 있으므로 연인과 함께라면 삼각대를 꼭 챙기자!
아오오는 (out of Ordinary)의 줄임말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천혜의 경관을 만끽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우리를 꺼내주려는 듯 이곳은 표선과 성산 일출봉 사이 조금은 외진 곳에 있다. 외관이 카페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예쁜데 처음 봤을 때 미술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한가운데 중심을 관통하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고 카페 뒤편 가장 좋은 자리에는 귤나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공간을 꽉 채우지 않고 공백을 많이 둬서 여유가 느껴졌다. 2층은 통창으로 되어 있어 자리에 앉아 바다를 볼 수 있고 밖으로 나가 베란다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알록달록 지붕을 가진 시골 마을도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카페 앞바다에 돌고래 가족이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다고 하니 정말 천혜의 경관을 만끽하는 공간이라는 카페 모토가 잘 어울렸다.
카페 휴일로를 처음 방문하면 이곳이 주택인지 카페인지 헷갈릴 수 있다. 입구에 거대한 돌담이 마치 저택에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마당에는 부드러운 잔디가 깔려있었는데 너무 깔끔히 정돈되어있어서 돗자리를 깔고 눕고 싶었다. 라탄 의자와 잔디, 바다가 너무 잘 어우러져서 친구는 하와이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내부가 모두 통유리로 되어있고 2층과 마당도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어 어느 자리에 앉아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바다뿐만 아니라 늦은 저녁 시간에 가면 예쁜 일몰까지 덤으로 볼 수 있는 카페들도 있다. 카페 데스틸과 클랭블루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카페로 멋진 일몰 뷰와 더불어 모던한 인테리어, 강렬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카페이다.
2020년 오픈한 신상 카페 데스틸은 일몰을 위해 지어진 카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장님께서 일몰에 정성을 들이셨다. 처음 건축의 시작부터 차귀도 뒤편으로 지는 해를 잘 볼 수 있는 각도로 건물을 설계하셨다고 한다. 일몰이 예쁜 날은 항상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주셔서 검색해보면 이곳의 일몰 모습을 미리 봐볼 수 있다.
내부에는 빨강, 파랑, 노란색이 유독 많이 보이는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눈에 익은 구조와 색깔이었다. 사장님께서 '몬드리안'이라는 화가를 정말 좋아하셔 그분의 작품들에서 카페 인테리어의 영감을 많이 얻으셨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 근대미술 파트에서 꼭 등장하는 화가이기 때문에 카페에 들어가면 대부분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미술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컵의 디자인과 카페 로고, 테이블, 의자, 책장까지 모든 곳에서 몬드리안의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몬드리안이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점에서 커피머신부터 카페 곳곳의 소품들을 네덜란드로부터 공수해 왔다고 한다. 몬드리안과 네덜란드 이야기로 가득 채운 이 카페를 방문하면, 여유가 있을 때는 사장님께 직접 카페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커피 한잔으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긴 미술관을 관람한 느낌이었다.
신창 풍차 해안도로 바로 옆에 있는 클랭블루라는 카페는 갤러리형 카페이다. 예전에는 2층에 작품들을 전시하고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몇 개의 예술작품만 두고 카페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갤러리가 없다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제주 건축 대전에서 상을 받았을 만큼 멋진 외관과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시그니처 색깔이 파란색이다. 프랑스 작가인 '이브 클랭'의 정신을 모티브로 하여 새파란 제주 바다 앞에 파란 테마를 가진 카페를 열었다고 한다. 카페 안에서는 테이블과 벽, 쟁반, 2층의 작품들까지 곳곳에서 진한 파란색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카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2층에 있는 통유리로 된 커다란 액자이다. 유리 액자를 통해 풍차와 바다가 보이는데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 아름답고 몰입돼서 가만히 보다 보면 어느새 액자가 붉게 물들어 버린 모습을 보게 된다. 유리 액자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작품 속에 나를 넣어볼 수도 있다.
이렇게 현대적 감성으로 새로 지은 카페들뿐만 아니라 제주에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도 많다. 그런데 보통 이런 카페는 자리가 좁아 야외 자리가 없다면 오래 앉아있기 눈치가 보이고 테이블이 가까워서 옆 테이블에 들릴까 봐 조용조용 말하게 되는 불편함이 있었다. 어떤 곳은 내부는 전부 수선하고 지붕만 오래된 느낌으로 남겨놔서 '차라리 새로 짓는 게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설펐다. 하지만 정성 들인 수선으로 세련됨과 옛것의 포근함을 함께 아울러 새로 지은 카페보다 멋진 곳도 있었다. 바로 '풀베개'와 '3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카페이다.
풀베개는 제주도 남서쪽 내륙에 있는 카페로, 울창한 고목들 사이에 있는 옛 주택을 개조한 것이고 3인칭 관찰자 시점은 서쪽 신창 풍차 해안 근처 바닷가의 옛 주택을 개조한 것이다. 두 곳 모두 본관과 별채로 구성되어 있고 마당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좌석이 있는데 바로 원형극장 같은 동그랗게 놓여 있는 의자들이다. 머리로는 뭔가 카페와 어울리지 않게 부조화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한번 앉아보고 싶었는지 어느새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본관에 이러한 좌석들을 놓아둔 것에서 사장님의 센스가 느껴졌다. 별관에 가면 우드 톤의 따뜻한 내부와 예스러운 정갈한 좌석을 볼 수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차와 아름다운 바다는 덤.
풀베개는 오래된 도서관 앞에서나 볼 수 있던 일자 의자를 나무 밑에 두고 과일 수확 상자를 야외 좌석으로 곳곳에 배치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주변에 귤나무들은 여기가 제주라는 것을 말해주었고 곳곳에 배치해둔 귤에서는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실내는 나무, 돌, 콘크리트 같은 원재료를 자연스럽게 노출해 놓았는데 단순한 것 같으면서 지루하지가 않았다. 제주스러운 옛 건물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카페를 찾는다면 이곳들을 방문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