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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귤 Apr 10. 2021

러닝과 바닐라라테

  여행은 먹거리, 사진, 운동 등 어떠한 것이든 테마를 잡고 하면 즐거움이 배가 된다. 나는 러닝이라는 여행 테마를 가지고 있어서 어딘가로 떠날 때 뛸 것을 대비해 배낭에 운동화와 운동복을 꼭 챙겨 간다. 그리고 여행 기간 동안 하루 정도는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심 속 공원이나 해변을 달려본다. 저녁에 아무리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던 도시라도 아침에는 깨끗이 정돈된 민낯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러닝을 하면서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현지 사람들도 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간격을 맞춰 달려도 보면 마치 내가 그 도시에 오래 산 주민이 된 기분이 든다. 러닝이 끝나면 마트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를 사 들고 근처 공원으로 간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조용한 아침 풍경은 며칠간 여행의 들뜸 속에 요동치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숨을 고르며 공원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면 그간의 여행이 정리되고 다시 여행의 첫날로 돌아온 것처럼 에너지를 얻는다. 이렇게 여행지의 아침을 온전히 느끼고 방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씻으면 '여행 오길 잘했다.'라는 행복감이 몸을 감싼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러닝을 했던 아침 풍경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제주도에서도 어김없이 아침 러닝을 해보았다. 제주 시내는 오르막 내리막이 많고 길이 좁아 러닝을 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산책로가 있는 도두봉 근처 해변으로 나갔다. 낮에는 자동차 엔진 소리와 관광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던 해변이 아침에는 정말 고요했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니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휴가 온 기분이 들어 오늘은 왠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동이 트며 푸른 바다와 붉은 해가 땅따먹기하는 모습에 뜀박질을 멈추고 잠시 앉아 먼바다를 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가 마치 나에게 자주 오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제주도 바닷가 근처는 어떤 곳이든 해변을 따라 길이 나 있는 곳이 많다. 바다와 숙소가 가깝다면 러닝을 하지 않더라도 하루 정도는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아침에는 저녁과 다른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시내 가까이에는 도두봉 근처 무지개 해안도로와 탑동 이마트 앞쪽으로 바닷가 산책길이 있다. 

러닝 명소 용두암-도두봉 산책로

  제주도에 놀러 왔던 친구 중에 특별한 여행 테마를 가지고 온 친구가 있었다. 바로 바닐라라테. 이 친구는 제주도에서 여러 카페를 가보면서 최고의 바닐라라테를 찾아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미안하지만, 코웃음 쳤다. 제주도에서 바닐라라테는 뜬금없기도 하고 '시럽 넣은 커피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닐라라테는 커피에 시럽이나 파우더가 들어가기 때문에 온전히 커피의 향이나 맛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멀리 여행 온 친구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고 우리는 바닐라라테가 유명한 카페를 급하게 찾아보기 시작했다. 폭풍 검색의 결과로 우리는 첫 방문지를 '도렐 커피'로 정했다. 여기는 특이하게도 시그니처 메뉴에 바닐라라테가 있었다. 친구는 엄청나게 들떴다. 보통 카페에 바닐라라테를 시그니처로 하는 곳은 드물기 때문이다.

바닐라라테 투어의 시작

  친구는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닐라라테를 시켰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친구는 냄새부터 맡았다. 나는 "와인 마시냐?"며 비웃었다. 하지만 바닐라라테를 한입 먹은 친구의 말을 듣고 너무도 놀랐다. 친구는 '이건 시럽으로 만들었는데 기존 공산품은 아닌 것 같다.'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바닐라라테를 마치 와인의 시음 평처럼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오타쿠 같을 수 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본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나는 친구의 말이 맞는지 궁금해서 빈 잔을 반납하면서 직원에게 바닐라라테에 어떤 것이 들어갔냐고 물어보았고 직원은 카페에서 직접 만든 시럽을 넣었다고 했다. 나는 이후에 적극적으로 친구를 도와 카페를 찾았다. 바닐라라테가 맛있는 집. 우리는 이후에 일정 사이사이마다 짬을 내 하루에 세 군데씩 카페를 다녔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지막 날까지 친구는 자신의 기억 속 최고의 바닐라 라테보다 괜찮은 집을 찾진 못했다고 했다.


  친구가 여행을 왔던 기간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 오름에 가는 날은 구름이 끼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는 날은 너무 더워 햇볕에 살이 다 타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고 했다. 친구는 바닐라라테와 함께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가끔 여행 가서 러닝을 하며 봤던 풍경과 사람을 기억하듯 친구는 바닐라라테의 맛과 향을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에겐 사소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겐 여행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정표가 여행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도 제주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만의 여행 테마를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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