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국을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호동왕자는 단숨에 대무신왕의 신임을 얻었고, 태자 자리에 한층 가까이 다가간 듯했다.
그런데 그렇게 호동왕자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불안해하고 시기하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대무신왕의 정비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 해우를 제치고 호동왕자가 태자가 되어 훗날 왕위에 오를 것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시로 대무신왕에게 호동왕자를 참소했다.
“호동왕자는 저를 어머니로서 대우하지 않습니다.”
“호동왕자는 장차 자신이 고구려왕이 될 것이라 믿으며 저와 해우를 자신의 아래로 보고 있습니다.”
“호동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저나 해우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무신왕은 그런 말을 하는 정비를 나무랐다.
“왕비는 호동왕자가 친아들이 아니라서 그렇게 모함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호동왕자가 제게 음행을 하려고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정비는 다급한 나머지 최악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처음에 대무신왕은 정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자칫하면 정비가 대무신왕의 눈 밖에 날 처지였다.
이에 정비는 눈물까지 흘리며 호동왕자를 궁지에 몰았다.
“믿어지지 않으시면 호동왕자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여태까지 제 자신도 부끄러워 차마 입 밖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이 거짓이라면 제가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너무도 완강한 정비의 말에 대무신왕은 혼란을 느꼈고 호동왕자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
정말 호동왕자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불효인 동시에 불충(不忠)이다.
아버지이자 왕인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대무신왕은 호동왕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비가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고구려 조정에서 정비를 옹호하는 세력은 막강하다.
대무신왕이 기어이 호동왕자를 태자로 세우려 한다면 강력하게 반발할 세력이 생길 것이고, 그것은 대무신왕의 위치까지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안 됐지만 호동왕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겠구나.’
대무신왕은 호동왕자에게 칼을 내리며 자결을 명했다.
정비를 능욕하려 했고, 왕위를 넘본다는 죄목이었다.
호동왕자는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고 말았다.
호동왕자의 편에 있는 신하들이 안타까워하며 호동왕자에게 말했다.
“왕자님의 결백을 주장하십시오. 이대로 자결하신다면 그 억울함을 어찌 풀려하십니까?”
하지만 호동왕자는 거부했다.
“내가 결백을 주장하는 것은 어마마마가 나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고, 아바마마의 고충을 더하는 것이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명을 전달받는 순간 자신이 늪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점점 깊이 들어가는 늪이다.
저항한다면 반역이 되는 것이고, 용서를 빈다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목숨을 구하려다가 비참한 죽임을 당하느니 깨끗이 자결하리라 결심했다.
그는 죽기 전에 낙랑공주를 생각했을까?
사랑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으로 인해 희생된 낙랑공주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호동왕자가 자결한 그 해에 어린 해우가 태자가 되었다.
호동왕자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던 정비의 계략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고구려 왕조에는 불행이었다.
훗날 왕이 된 해우는 모본왕이라는 폭군이었다.
모본왕은 폭정을 일삼다가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로 하여금 자명고와 자명각을 못 쓰게 한 것을 대무신왕의 계략으로 보기도 한다.
불과 열댓 살의 호동왕자가 처음부터 그런 엄청난 계략을 생각했을까?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대무신왕, 전쟁에 노련한 대무신왕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대무신왕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이용해 낙랑국을 정복하고, 그 후 아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역사에는 가끔 잘난 아들을 견제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왕들이 있다. 대무신왕의 아버지인 유리왕이 해명태자에게 그러했고, 조선의 인조가 소현세자에게 그러했다.
대무신왕 역시 그런 어리석은 왕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모본왕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대무신왕의 혈통은 고구려 왕조에서 끊어졌다.
대무신왕을 많이 닮았던 호동왕자가 왕이 되었다면 고구려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