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국가에서 유리왕은 두 명이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과 신라 3대 유리왕이다.
고구려 유리왕은 유리명왕이라고도 하고, 신라 유리왕은 유리 이사금이라는 별칭이 있다.
내가 글 쓰고자 하는 유리왕은 고구려의 유리왕이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 유리왕의 <황조가>다.
이 시가를 지은 유리왕이 어쩐지 낭만적이고 섬세한 왕으로 생각되었다.
유리왕에게는 화희와 치희라는 왕비가 있었는데 사이가 좋지 않아 따로 궁을 지어 살게 했다.
하지만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두 사람은 심하게 싸웠고, 골천 사람인 화희는 한나라 사람 치희에게 "천한 한나라 사람이면서 어찌 이리 무례하냐?"며 비난했다.
졸지에 자신의 출신으로 모욕당한 치희는 수치심을 느끼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냥에서 돌아온 유리왕은 치희를 데려오려고 뒤쫓아갔지만 치희는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숲에서 쉬고 있던 유리왕의 눈에 암수가 사이좋게 노니는 꾀꼬리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황조가>를 지었다.
그러나 이런 일화와는 달리 유리왕은 무자비한 면이 있었다.
첫 번째 아들인 태자 도절이 갑자기 죽은 뒤에 해명이 태자가 되었다. 해명태자는 힘이 세고 용맹스러웠다.
어느 날 횡룡국의 사신이 와서 크고 강한 활을 해명태자에게 선물로 바쳤다.
해명태자는 그 자리에서 활을 당겨 꺾어버렸다. 고구려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 행동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황룡국 왕은 노발대발했다. 고구려 입장이 난처해지자 유리왕도 화가 나서 해명태자를 황룡국으로 보내면서, 황룡국 왕에게는 오만불손한 태자를 죽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막상 해명태자를 만난 황룡국 왕은 태자의 뛰어난 외모와 용맹스러움에 노여움을 잊었고 오히려 융숭하게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리왕은 이에 더욱 격분했다.
결국 해명태자에게 칼을 보내 아버지인 자신과 고구려를 위험에 빠뜨린 죄를 물어 자결을 명했다. 해명태자는 변명도 호소도 하지 않고 자결했다.
해명태자가 경솔한 면은 있었지만 새 도읍지 국내성으로 가지 않고 전 도읍지 졸본에 있으면서 부하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해명태자가 두려워서 죽게 한 것은 아닐까? 게다가 황룡국 왕에게 인정받는 것을 보면서 해명태자에게 더욱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첫 번째 태자 도절의 죽음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도절태자가 있던 시절에 동부여 대소왕이 화친을 위해 도절태자를 볼모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도절태자는 동부여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거부했다.
화친조약은 물거품이 되고 화가 난 대소왕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폭설이 심하자 대소왕은 되돌아가면서 고구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도절태자는 이렇다 할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죽었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병사인지 자결인지 타살인지는 모른다.
태자면서 고구려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유리왕의 눈에 나서 죽임을 당했을 기능성도 크다.
그렇다면 유리왕은 유약한 태자도 못마땅하고 잘난 태자도 견제하는 변덕스런 왕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