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의 흑역사는 그 후에도 이어진다.
나라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제천)를 준비하는데 제물로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신하 두 명이 돼지를 쫓아가서 잡고는 쉽게 가져가기 위해 돼지의 다리 힘줄을 끊었다.
유리왕은 제사에 부정이 타게 생겼다면서 두 신하를 구덩이에 던져 넣어 죽였다.
그 후 유리왕은 시름시름 앓았다.
무당이 "죽은 신하들이 한을 품어서 아픈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리왕은 자신이 죽인 신하들의 넋에 사과하는 의식을 치렀고, 그 후 병이 나았다.
유리왕이 사냥을 즐겨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협보라는 원로대신이 나랏일에 전념할 것을 충언했다.
협보는 유리왕의 아버지인 주몽과 함께 동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건국공신이었다.
유리왕은 협보의 말에 크게 노해서 협보를 벼슬에서 내쫓고 정원지기로 일하게 했다.
협보는 분개하여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유리왕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와 이별했다.
유리왕이 어머니 예 씨 부인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를 세웠던 것이다.
아버지 없다고 홀대받으며 자라던 유리는 아버지가 고구려 왕이라는 사실을 예 씨 부인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일곱 모서리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아래에 아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을 숨겨두었으니 그것을 찾아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말도 전했다.
유리는 처음에는 산속을 헤맸는데 일곱 모서리의 돌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절망감에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드러누웠는데 주춧돌이 일곱 모서리라는 걸 발견했다. 주춧돌 위는 소나무기둥이었다.
유리는 주춧돌 주변의 흙을 파헤쳤고 반으로 부러진 칼조각을 찾아냈다.
더 이상 동부여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예 씨 부인과 함께 고구려로 갔고 주몽 앞에서 부러진 칼조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주몽이 보관해 둔 칼조각과 딱 맞았다.
유리는 주몽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주몽이 아들에게 이런 어려운 문제를 냈던 것은 지략과 용기를 시험하려 했던 것이리라.
성장하면서 아버지 존재를 찾지 않는 아들이라면,
일곱 모서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아들이라면,
자신이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아들이라면 굳이 찾지 않을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유리왕은 아버지가 숨겨둔 칼조각을 찾을 정도로 지혜롭고,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까지 갈 정도로 대담했다. 갑자기 이별하게 된 치희를 그리워하며 <황조가>를 지을 정도로 감성적이었다.
고구려 초기라서 나라 힘도 약하고 왕권도 약해서 유리왕도 살얼음 위를 걷듯 조마조마하며 왕위에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신하들이 비류와 온조를 따라 나가 백제를 세운 터라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왕이 되었기에 의심이 많아지고 불쑥불쑥 치솟는 분노를 삭일 자제심도 사라졌을까?
무엇보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행태는 안타깝다. 좀 더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