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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소확행을 허하라

가벼움을 수용하기

by 탱귤도령


다운로드 (3).jpeg 《안자이 미즈마루》, 무라카미 하루키



한창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시절이 있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다. 이 단어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에 집필한 수필에 처음 등장한다. 하루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일상 속 자잘한 즐거움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점은 하루키 문학 기저에 깔린 시대정신이다. 많은 문학평론가는 하루키의 소설을 ‘체제 변혁과 정치 혁명의 희망을 잃고 개인적 영역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행하는 소극적 저항(?)의 서사로 분석한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은 거창한 대의명분에 관심이 없다. 다만 본인의 주변을 나름대로 알차게 꾸미고 살아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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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한 사회학자도 작금의 시대 풍조를 비슷하게 결론 내렸다. “우리는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를 기다리지도 않고, 혁명과 해방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저 ‘숨 쉬고’ 싶어 할 뿐이다. 그저 더 잘, 더 ‘가볍게’ 살고 싶어 할 뿐이다.” (질 리포베츠키, 《가벼움의 시대》)



하루키는 야망을 상실한 동시대 젊은 세대의 멘탈리티를 가감 없이 묘사했다. 소확행도 하루키의 시대 분석에 비롯되어 나온 신조어다.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사회에 신경 쓸 바에 내가 사랑하는 물건과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을 위한 언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체제에 편입되어 수레바퀴의 부품이 되길 소망하는 청년들의 시대.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미력함을 자각한 청년들의 체념과 떼 놓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moderntimes-1080x675.png 모던타임즈(1936) - 찰리 채플린



그 탓에 몇몇 작가, 사회비평가는 소확행을 기만적 용어로 폄하하곤 했다. 불합리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사회에 순응하며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만 재생산할 뿐이라고. 소확행을 즐기려면 내가 좋아하는 취미나 사물을 소비해야 하고 결국 ‘당신의 행복을 구매하세요!’라고 외치는 상업적 캐치프레이즈에 그대로 놀아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소확행을 거부해야 할까? 정치·사회적 동향에 늘상 관심을 쏟으며 ‘투사’의 삶을 살아야 할까? 나는 여기에는 반대를 표한다. 소소한 행복을 향유 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이라고 주장하련다. 심리학자의 실험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일시적인 큰 성취보다 매일매일의 작고 좋은 순간들이 꾸준히 반복될수록 삶의 전반적인 만족도와 행복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D. 마이어스, 《심리학개론》)



AA.26510799.1.jpg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물잔과 커피포트 (1761)



영국의 예술사가 가이 대븐포트의 에세이에 나오는 대목을 소개하고 싶다. 그는 세인트루이스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한다. “초라한 식당에 책을 들고 가 본 사람이라면 낯선 도시에서 저녁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는 것만큼 순수한 즐거움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한가한 오후, 햇살은 비스듬히 창문 넘어 식탁에 따스함을 드리우고 있다. 구석에 자리한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좋아하는 책을 읽는 순간의 충만함을 상상해 보라. 이것이야말로 결코 놓치면 안 되는 행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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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을 아무리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든 간에, 사소한 일상의 행복은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얼그레이 차 한 잔을 마실 때, 비 오는 날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색소폰 연주가 일품인 재즈 스탠다드를 들을 때. 우리네 삶은 한 폭의 정물화처럼 아름다워진다. 무거움을 강요 말라. 우리에게 소확행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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