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나쁘고 죽음도 나쁘다

이런! 인간의 '노답' 실존

by 탱귤도령
"인간은 그토록 많은 진실을 견뎌내지 못하나니"
(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 T.S. 엘리엇, 「사중주」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삶은 살 만해." 숨 막히게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주문을 외우고,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여기, 우리의 희망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철학자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철학 교수 데이비드 베나타(David Benatar)다.


베나타는 현대 철학계에서 악명 높은 인물로 꼽힌다. 그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에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심각한 해악이며 인류는 출산을 중단하고 점진적으로 멸종해야 한다는 반출생주의를 주장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 살펴볼 『인간의 곤경: 인생의 가장 큰 질문들에 대한 솔직한 안내서 (The Human Predicament: A Candid Guide to Life’s Biggest Questions)』 는 인간 존재가 처한 비극을 정교하고 잔인하게 그려낸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의 삶, 아니 세상 모든 존재의 삶은 어떤 선택을 해도 파멸을 피할 수 없는 절망적 상태에 놓여 있다. 삶이란 살아볼 만한 선물이 아니라, 태어남과 동시에 입게 된 치명적인 피해다.


우주, 삶, 무의미


01.35562928.1.jpg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 눈보라-항구 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 (1842)


베나타가 묘사하는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우주를 직시해야 한다. 광대한 우주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수천억 개 은하 가운데 먼지 같은 행성 하나에 사는 미미한 존재다. 우주는 우리의 희망에 무관심하다. "신이 우리에게 목적을 부여했다" 는 위로는 객관적 관찰만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우리는 진화의 결과로 우연히 등장했고, 우리가 자랑하는 성취들—사랑, 가족, 문명, 예술—도 결국 사라진다. 모든 인간적 노력과 성취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無)로 돌아갈 운명이며,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길고 반복적인 여정(a long, repetitive journey to nowhere)"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적 무의미함이다.


물론 그는 가족이나 공동체에서 얻는 지상의 가치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소속감을 느끼는 일은 분명 값지다. 문제는 지상의 의미가 우주적 공허를 결코 상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영원하고 초월적인 의미를 갈망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건 부서지기 쉬운 찰나의 의미뿐이다. 베나타의 사유는 바로 이 간극, 즉 갈망과 현실 사이에서 결핍에서 출발한다.


퇴로 없는 덫: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의 재앙


1920px-Colorized_King_Solomon_in_Old_Age.png 귀스타브 도레 - 노년의 솔로몬 (1866), colorized by Yitzilitt


목적 없는 우주 속에서 우리의 실존은 두 개의 덫 사이에 끼어 있다. 한쪽은 삶의 고통과 무의미이고, 다른 쪽은 죽음의 공포와 소멸이다. 우리는 보통 삶이 고통스러우면 죽음을 안식으로 여기거나, 죽음이 두려우면 삶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 위안 삼는다. 베나타는 이 두 기대를 모두 꺾는다. 삶도, 죽음도 최종적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삶을 곰곰이 사유해 보자. 베나타는 우리가 인지적 편향 때문에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훨씬 낫다고 착각한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편향은 세 가지다.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을 더 잘 떠올리는 낙관주의 편향, 악조건에 금방 익숙해지는 적응, 그리고 불행한 사람과 비교하며 얻는 위안이 그것이다. "삶의 질"에 집중해 볼까? 고통의 강도와 지속 시간은 쾌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만성 통증은 있어도 만성 희열은 없다. 우리는 배고픔, 갈증, 피로, 권태, 좌절을 끊임없이 겪는다. 쾌락은 일시적이지만, 질병이나 심리적 고통은 수십 년을 지속할 수 있다. 평범한 삶조차도 실제로는 수많은 불편과 질병, 권태와 좌절의 연속이다. 보편적 믿음과 달리 삶은 훨씬 질이 낮고, 무의미한 나날들의 연속이다.


1000px-Оптимист_и_пессимист.jpg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 -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1893)


죽음은 어떠한가? 베나타는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논변 "내가 존재할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나는 없으니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을 단칼에 거부한다. 죽음이 나쁜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누릴 수 있었던 잠재적 '좋음'을 영구히 박탈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나라는 의식의 중심점과 고유한 관점이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절멸(annihilation)이다. 죽음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지만, 그 대가로 존재 자체를 말살한다.


루크레티우스는 "태어나기 전의 무(無)와 죽은 후의 무는 같으니 죽음은 두렵지 않다"라고 말했다. 베나타는 여기에도 반대의사를 밝힌다. 태어나기 전에는 '잃을 나'가 없지만, 한 번 존재한 뒤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미 세계를 가진 존재에게 죽음은 그 세계를 통째로 빼앗는 사건이다. "존재하지 않음"과 "존재하다가 사라짐" 사이에는 큰 비대칭이 있다. 결국 우리는 살아서는 고통의 늪을 헤매고, 죽음은 고통을 끝내지만 존재 자체를 지운다. 이래도 최악, 저래도 최악이다. 결론은 명확하다. 삶은 나쁘다. 죽음도 나쁘다.


환상이 은폐하는 존재론적 공허


Untitled_drawing_by_Zdzislaw_Beksinski_1958.jpg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 무제 (1958)


베나타는 인간이 끔찍한 현실을 위장하기 위해 발명한 가장 강력한 마취제인 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많은 종교인이 "우리는 신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가치 있다"라고 말한다. 베나타는 묻는다. 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어느 곤충학자가 개미 사육장을 만들어 개미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야"라고 이야기한들 그게 개미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베나타는 신의 계획이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주장은 철학적 근거가 약하다고 일축한다.


종교인들은 신의 계획 속에서 고통도 역할이 있다고 항변한다. 베나타는 이런 류의 신정론(Theodicy)을 비판하며, 킴정론(Kimdicy)이라는 패러디를 꺼내든다.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도 "수령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체제 선전원의 논리가,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조물주의 신비로운 계획이 있다"고 말하는 종교인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종교는 인간이 처한 곤경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두꺼운 안대일 뿐이다.


자살도 나쁘다


960px-Edouard_Manet_-_Le_Suicidé.jpg 에두아르 마네 - 자살 (1877-1881)


삶이 이토록 비참하다면 자살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베나타에게 자살은 결코 '해방'이 아니다. 자살은 삶의 고통이라는 악(惡)을 피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또 다른 악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비참한 선택이다. 베나타는 자살이 합리적일 수 있는 상황을 인정한다. 삶의 질이 극단적으로 낮아져, 살아있음이 죽음보다 큰 해악이 될 때, 자살은 차악(次惡)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남겨진 이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 자체의 비극을 고려할 때 결코 가볍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결국 자살조차 인간의 곤경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저 구슬픈 단말마의 비명을 무거운 침묵으로 덮을 뿐이다.


남는 것은 한 줌의 연민


1280px-Rousseau-Hungry-Lion.jpg 앙리 루소 - 굶주린 사자가 영양에게 달려드는 모습 (1905)


베나타의 결론은 참담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고, 살아가며 고통받다 결국 죽음이라는 파멸로 끝을 맺는다. 이 비극 앞에서 베나타가 제시하는 태도는 '실용적 염세주의'다. 다음의 행동 준칙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진실을 직시하라. 순진한 낙관과 종교의 환상에 속지 마라. 인간의 삶이 비극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헛된 기대를 버리고 삶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


둘째, 이 비극을 대물림하지 말고 출산을 거부하라. 존재하지 않는 자는 고통도 모르고 죽음도 모른다. 그들에게 '인간의 곤경'을, 존재의 짐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선택이다.


이미 세상에 던져진 우리끼리는 서로 연민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론적 덫에 끼어 있는 처지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여기고, 서로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만이 이 공허한 우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몸짓이다. 베나타는 우리에게 억지로 웃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비극적인 무대 위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조용히 삶의 막이 내리기를 기다리자고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사실 이 책은 읽기 편한 책이 아니다. 저자 역시 말머리에서부터 영 불쾌한 독서가 될 것이라 경고한다. 기분 전환용으로 이 책을 집어 든 분이 계시다면 필사적으로 말리고 싶다. 대부분의 독자에게 우울함을 선사할 확률이 높다. 아직 한국어 번역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일지 모르겠다. 비슷한 논지를 담은 토머스 리고티의 『인간종에 대한 음모』 는 번역되었는데, 이 책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언젠가는 번역되어 많은 독자들에게—좋든 나쁘든—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길 기대해 본다.



81LLVImYDKL._AC_UF1000,1000_QL80_.jpg The Human Predicament - David Benata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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