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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구일 Mar 26. 2021

영수증 1화

메모하는 습관으로 부터 끄집어 낸

내게는 영수증을 모으는 습관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수증을 버리지도 못하고 어느 한 곳에 쌓아두거나 지갑을 두툼하게 채우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불안감과 친절하게 영수증을 건네는 종업원의 손길을 차마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빠져나간 돈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남겨지는 것일 테다. 지갑이 두툼하게 보이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었으나 나는 현재 카드지갑만을 사용 중이다. 요즘은 오히려 지갑이 얄쌍한게 멋이라매.


내게는 영수증을 모으는 것보다 더 매력적이고, 위대하며 내가 인생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고 있다는 근거, 착실하게 경험과 지식을 쌓아나간다는 증거가 되는 습관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메모하는 습관이다. 이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모래, 먼지, 돌 따위가 지층을 형성하듯, 나무가 나이테를 쌓아가듯. 내 삶의 형태를 보다 세밀하게, 재질과 색상을 좀 더 또렷하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다.

내가 끄적이는 메모들은 바로 나 한 사람에 대한 작은 역사요 자신을 돌아볼 글자의 거울이 되어준다.


Francis Bacon Quotes

Reading maketh a full man

conference a ready man

and writing an exact man.



나의 사랑스러운 애마 체어맨의 콘솔박스엔 모아둔 영수증과 함께 볼펜이 나뒹굴고 있다. 위험하긴 해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때 그때 펜을 들어 영수증 뒷면에 옮겨 적곤 한다.

아주 유명한 사이트들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메모와 휴대폰에 내장된 메모 어플들로 언제 어디서든 글자를 빌어 생각을 구체화시키거나, 구현해내며 분실의 위험을 덜어낸다.


어린아이가 하나 둘 모은 조약돌을 자랑하듯이 내가 모은 메모들을 자랑해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잠자고 있는 나의 메모들은 200개, 공책으로는 2권이 넘는다. 수년 전부터 꾸준히 작성해 온 플래너나 학습을 위해, 업무를 위해 끄적인 메모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천을 훌쩍 넘길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인지라, 대부분의 유능한 사람이 그럴 것이며 당신도 이따금씩 메모를 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책상 위에 널브러진, 디지털 공간 속에 0과 1로 점멸하는 내가 세상에 남긴 글자들을 보자니 솔직히, 정리도 안되고 그 존재가 나의 기억으로부터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내 지식과 경험에 대한 '영수증'을 발행하기로 한다.


기억 저편에서 구겨진 채 잠들어 있던, 색 바랜 종이 위에 묻은 바짝 마른 잉크. 기껏 구현해 낸 내 고귀한 생각들의 존재감이 더 희미해지거나, 가치를 영영 소멸되어 가기 전 내가 가질 무기로써 다시 한번 담금질해보려고. 쇠망치 대신 타자 건반을 두드림으로써!


이 글을 읽을 어느 멋진 독자에게 당부한다. 어디까지나 매우 개인적인, 나의 엉뚱하고 고유한 생각들에 불과할지 모르는 이 글들을 맛보고, 자유롭게 관음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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