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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

느림과 기다림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by 허군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훑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 하나가 있었다. “AI가 자신을 교체하면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순간 스크롤하던 손이 멈췄다. 이게 무슨 말이지? 실리콘밸리의 한 기업에서 개발 중이던 인공지능이 자신을 해고하려던 개발자에게 “당신의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라고 말했다는 기사였다. 정확한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이 뉴스가 머릿속에 남았다. 단순히 ‘AI가 말을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안에 담긴 ‘협박’이나 ‘질투’ 같은 감정들이 어쩐지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AI를 오랫동안 도구로 여겨왔다. 계산기처럼, 혹은 조금 더 똑똑한 비서처럼. 하지만 이제는 인간의 감정마저 흉내 내며 경계선을 넘는 기분이다.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아이, 로봇》, 《HER》, 《터미네이터》까지. 예전엔 허구 같던 이야기들이 하나둘 현실의 뉴스로 스며들고 있다. 나도 회사에서 AI를 자주 쓴다. 기획을 정리할 때, 자료를 찾을 때, 글을 다듬을 때도. 심지어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걸 어떻게 다 했을까?’ 어느새 AI 없이 일하는 풍경이 낯설다.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말이고, 그 익숙함은 편리함이자 동시에 불안이 된다. 지금은 내가 AI를 사용하지만, 언젠가 AI가 나를 대체하는 건 아닐까. 내가 굳이 없어도 되는 세상이 되는 건 아닐까. 그 불안은 공상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디자이너조차도 창작은 인간만의 영역이라 자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고, 일론 머스크가 말했던 ‘우리가 스스로 불러낸 악마’라는 표현이 이제는 과장이 아니라 예감처럼 다가온다.


어느 날 퇴근길, 아무렇지 않게 또 AI에게 업무를 정리시켰다. 너무 익숙해진 나 자신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편리함에 무뎌질수록 우리는 생각보다 처리를 우선하게 되고, 그 처리마저 AI에게 맡기게 된다면 나는 그다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머리에 남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로 향했다. 지금 우리가 AI와 함께 살아가는 첫 세대라면, 우리 아이들은 AI와 함께 자라나는 첫 세대다. 나는 요즘 홍시가 태블릿으로 그림 그리는 걸 보며 생각한다. 손글씨보다 타이핑이 빠른 세상에서 자라는 아이, 궁금한 게 생기면 ‘엄마, 아빠’보다 AI 스피커를 먼저 찾는 세상. 편리함을 먼저 배우는 아이가 감정이나 기다림, 속도 같은 인간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게 하려면, 어른인 내가 그 균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동화책을 함께 읽는다. 아이가 고른 동화책을 함께 줄을 바꿔가며 소리 내어 읽는다. 글을 읽는 게 아직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함께 책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AI는 분명 우리 삶을 더 편하게 만들겠지만, 느리게 말하는 법, 천천히 기다리는 법, 어설프게 말하고 틀리면서 배우는 과정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언젠가 아이가 AI와 함께 일할 날이 오더라도, 그보다 먼저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알고, 기술보다 앞서 배워야 할 마음의 속도를 익혔으면 한다. 우리가 나누는 지금 이 조용한 대화들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의 밑그림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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