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면서 가장 어렵게만 느껴지는 '역지사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사자성어 '역지사지'라는 단어가 요새만큼 어렵게 느껴지는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양과 함께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린아이들의 처지에 서서 생각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엊그제 저녁시간 홍시를 어린이집에서 픽업하고, 우리 세 가족은 다 같이 집 앞에 있는 해돋이 도서관에 갔다. 홍시에게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소개해주고 조금씩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가게 되었고, 우리는 함께 책도 읽고 구경도 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홍시가 그림책을 보는 동안 우리도 같이 옆에서 책을 읽었는데, 정양이 갑자기 읽던 책을 나한테 건네줬다. 어린이들을 위한 매거진이었는데, 책에는 아이들이 요새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책을 건네받은 다음 정양이 읽어보라는 부분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읽는 내내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나름 육아를 시작하면서 최대한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정말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내용은 요새 유행하는 단어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요새 유행하는 단어들 중에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는데 아마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 요린이(요리+어린이) :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
- 부린이(부동산+어린이) : 부동산에 대해 처음 공부하려는 사람
- 캠린이(캠핑+어린이) : 캠핑 장비를 처음 사서 익숙치 않은 사람
티비나 웹에서 정말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다. 나 역시 이런 단어들을 듣자마자 어떤 설명없이도 바로 이해가 됐었고 나름 위트 있는 유행어라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진짜 어린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어린이들은 '어린이'라는 대상을 '무엇을 하던 잘 못하고 서투른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어른들에 대해서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어린이도 분명 아이들마다 잘하는 것들이 있고, 그중에서는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어른들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단지 나이가 어리고 신체적인 조건이 성인보다 작다고 해서 뭘 하던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어디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잘못된 편견으로 만들어진 유행어에 웃고 떠들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홍시를 쳐다봤다. 마냥 즐겁게 책을 읽는 홍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한 미안함이 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홍시가 3살밖에 안되었으니까 항상 뭘 해도 잘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는지 덜컥 겁이 났다. 홍시도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충분히 많고 시간을 좀만 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내가 스스로 어린아이니까 그 기준을 낮춰버린 건 아닐까 미안했다.
짧은 시간 동안 몇 장 안 되는 페이지를 읽으면서 정말 많은걸 느낀 것 같다. 이 책을 지금 한번 읽었다고 내가 바로 완벽하게 바뀔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노력해 봐야 할 것 같다. 항상 홍시 입장에 서서 홍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