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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속에서 잊고 있던 ‘손의 감각’

실수로 망쳐버린 줄 알았던 주말 아침

by 허군

주말 아침이었다. 바삭하게 구운 빵을 식탁에 올려두고, 브레빌 커피 머신으로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 향으로 하루를 시작할 생각에 기분이 좋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물병을 옮기다 한쪽 모서리로 그라인더를 툭 치는 바람에 물이 그라인더 안으로 주르륵 흘러들어갔다. 찰나였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물이 커피 원두 사이로 스며들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커피 그라인더에 물이 들어가면 부품이 녹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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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자책감이 먼저 찾아왔다. 이렇게 단순한 실수 하나로 아침의 고요한 루틴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평소 미뤄뒀던 그라인더 청소를 제대로 해보자고. 유튜브 영상과 블로그 포스팅을 찾아보며 하나씩 분해를 시작했다.


작은 나사와 부품들, 오래된 커피 가루가 숨어 있던 틈새를 붓으로 털고 천으로 닦아내며 나도 모르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무심코 닦아낸 가루 하나에도 만족감이 느껴졌다. 단순한 반복 작업이었지만,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고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각이 이상하게도 기분 좋았다. 아침의 작은 실수는 그렇게 나를 아주 조용한 몰입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디지털 속에서 빠르게 이뤄지는 시대에,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다루는 경험은 생각보다 귀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터치 한 번이면 식사도 주문되고, 목소리만으로 전등이 꺼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점점 손끝의 감각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아이를 떠올렸다. 요즘 아이들이 사용하는 학습지는 대부분 태블릿 기반이다. 알림에 따라 터치하고, 자동 채점으로 넘어간다. 종이에 연필을 쥐고 사각사각 글씨를 써내려가던 그 감각, 펜 끝의 떨림이나 잘못 써서 지우개로 지우는 과정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단순히 필기의 문제를 넘어서, 손의 움직임을 통해 배우고 익히는 그 작은 과정들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아이가 글씨를 쓰거나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블록을 조립하거나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시간. 그런 손의 움직임 안에 담긴 감정과 배움은 화면 속에서는 쉽게 얻기 어렵다. 그래서 더더욱 아이 곁에는 이런 ‘손의 경험’을 놓아줘야 한다고 느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도,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손으로 무언가를 해보는 일은 마음을 단단하게 해준다. 청소나 요리처럼 사소한 행위 속에서 오히려 집중과 치유가 일어난다. 스스로 무엇을 해냈다는 조용한 성취감, 그건 다른 어떤 편리함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잠시 바쁨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은 생각보다 따뜻할 수 있다. 순간을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일. 불완전한 순간 속에서 삶은 더 생생해지고, 손끝으로 느끼는 감각은 그 모든 시간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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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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