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9. 시작점
모든 것의 시작은 허황된 꿈이었다. 제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부터, 감당이 안될 만큼 어려운 일까지, 일의 경중을 떠나서 경험하기 전까지, 직접 손에 쥐기 전까지는 모두 pipedream이다. 꿈을 꾼 것은 꽤 오래전부터 다. 늘 꿈만 꿨다. 20살이 지나면, 25살이 지나면, 30살이 지나면 이뤄진 것들이 하나하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만이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때 가장 거창한 인생계획을 했던 것 같다. 10대가 본 나의 30대 모습은 현재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10대의 내가 본 나의 30대는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모든 것을 움켜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꿈을 천천히 꿔도, 1년 정도 나에게 쉼을 주어도, 진로가 여러 번 바뀌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른 기회가, 미래를 바꿀 충분한 시간들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는 믿었었나 보다. 그런 믿음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하고서부터이다. 일은 왜 하는지, 대학교는 왜 들어갔는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삶과 내가 일치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고, 어떠한 해결책 혹은 답도 얻지 못했다. 질문만 했고,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그때는 바꿔야 하는 방법들을 몰랐고, 주변에서 들은 조언들이 나에게 적용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의 시간들을 그런 식으로 채웠기에 대학교를 다니는 것에도 큰 미련이 없었다. 빠르게 졸업했고 바로 취직을 했다.
첫 회사 생활은 IT기업에서 시작되었다. 가산 디지털 단지역에 있는 산업단지 내에 건물에 있는 회사 중 한 곳이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인턴생활을 마치고서 정직원이 된 곳이었다. 주 5일 9시 출근 6시 퇴근, 다니던 인턴기간 동안 그리고 정직원이 된 후의 나의 스케줄이었다. 그 후 회사를 다니면서 늘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아침마다 19층까지 되는 회사에 도착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일,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들과 다 같이 줄을 서지 않는 식당을 찾는 일, 그리고 남은 쉬는 시간으로 양재천 거리를 한 번 정도 걸을 수 있는 일, 업무가 추가적으로 들어오면 다시 컴퓨터에 앉아서 업무를 끝내는 일, 탕비실에서 커피 한 번, 화장실에서 양치 한 번 하는 일, 가끔씩의 전체 회식 혹은 팀 회식, 또래 동기들과의 술 한잔이 거의 전부였다. 2015년의 외적인 나의 시간들은 분명히 촘촘한데, 어쩐지 내 안에서는 반복된 일상에 의미를 주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일들도 내가 들어맞지 않고 있구나.’ ‘꼭 내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 분명할 수 있는 일이구나’ 같은 지배적인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한 방화들은 자연스레 퇴사로 이루어졌고, 머지않아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5년 입사
2015년 퇴사
2016년 입사
2016년 퇴사
이력서를 읽어보니 입사를 하고,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고 , 다시 퇴사를 반복했다. 꽤나 바쁘게 지낸 것 같은데,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째서 그랬을까?’ 이직한 후의 직감은 내가 일을 곧 금방 두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고 동시에 ‘백수’라는 타이틀은 어떤 삶의 안정도 가져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퇴사 후의 공백 기간 동안 끔찍한 불안이 나를 여러 번 찾아왔고, ‘나를 찾는 시간’이라는 명목 하에 그만두게 된 직장의 의미는 사라졌다. 그동안 회사를 통해 얻었던 삶의 일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나 보다…….. 벗어나고 싶어서 퇴사를 했는데, 다시 궤도에 들어서려고 또 다른 이직을 찾다니…….. ‘한동안 정착되지 못하는 일들을 하겠구나’라고 스스로는 알아차렸다.
그렇게 막연한 무의식이 지배한 27년 동안의 내재된 욕망이 시작점이었다. 정착되지 못한 일상은 다른 곳의 욕망을 탐하게 되었고, 그것이 여행이라는 한 단어로 채워졌다. 그동안 간간히 3일, 7일, 10일 정도의 여행은 다녀왔지만, 해소되지 않은 욕망들이 분명 존재했다. ‘이미지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컸던 걸까?’, ‘전 세계의 랜드마크를 너무 많이 봐왔던 것이었을까?’ 모든 것을 한 번쯤은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의 pipedream은 그렇게 시작되었나 보다. 세계여행 계획을 세웠다. 우선 주변을 바꿨다. 자주 사용하던 sns에서 여행 커뮤니티, 그룹에 가입에 가입을 했다. 블로그도 개설하고, 여행자들의 책도 구매했다. 관련된 검색을 하고 보니 100가지도 넘는 여행 방법들이 나왔다. 그중에는 성공담도 있었고, 실패담도 있었다. 카페와 sns에는 여행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현재 여행 중인 사람들뿐 아니라,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까지 활발한 소통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공유하고, 여행 후기를 올리는 등 수많은 이야기들을 매일 업로드했다. 나는 아침부터 컴퓨터를 켰고, 해가 질 때까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있었다. 막연한 나의 꿈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모든 시간들을 구체적인 계획들을 위해 사용했다. 나의 모든 세계는 여행이라는 한 단어를 기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pipedream
이 단어를 사전으로 검색해보았다.
영문 정의를 찾아보니 : an idea or plan that is impossible or very unlikely to happen라고 나온다.
계획이나 아이디어가 불가능하고 언뜻 보면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이 뜻을 다르게 보고 있다. 내가 다르게 보는 뜻은, 문맥에서, 시험문제에서, 지문에서가 아닌 일상에서, 삶에서, 인생에서 해당되는 뜻을 말한다. 이 뜻은 ‘불가능한 일’임과 동시에 ‘모든 시작’을 뜻하기도 한다. 결국 은 누구에게나 발생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직접 시작하기 전, 시도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허황된 꿈같다. 안될 것 같고, 포기해야 할 것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pipedream은 허황된 꿈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허황된 꿈은 문제 속의 정답을 찾을 때는 적용되지만, 인생이란 연습 없는 게임에서는 아쉽게도 완전한 해석이 되지 않는다. 다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다시금 정의 내리게 된 이 뜻은 ‘시작점’이다. 꿈이란 것이 직접 성취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그렇다. 순조로워 보여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쉬워 보여도 막상 내가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따질 수 없다. 그래서 제 아무리 쉬워 보이는 것들도 이루기 전까지는 전부 pipedream이다.
간혹 우리가 ‘미친 소리’라고 들을 때가 있다. 상식에서 벗어난, 인류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들을 때 뇌가 반응하는 소리이다. 하지만, 모든 인류사의 발전은 이런 시작점에서 기인했다. 그리고 이런 시작점을 가진 pipedream이 있어야, 스스로의 삶에도 무언가 의미를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런 pipedream이 정말 dream을 이룰 것은 아마도 자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