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야 Dec 16. 2021

가만히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포장이사를 끝내도 정리해야 할 짐들은 넘어야 할 산처럼 쌓여있다. 이틀에 걸쳐 널브러진 짐들에게 자리를 정해주고 이젠 구석구석 들어찬 작은 물건들을 정리 중이다. 이사 때마다 옮겨다닌 책상 서랍 속엔 차마 버릴 수 없는 추억 가득한 물건들이 들어있다. 연애 시절 편지들, 아이들과 주고받은 작은 메모들, 선물 받은 만년필, 한 뭉텅이의 사진들...... 일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지난 시절 편지와 메모들을 읽고, 사진들을 꺼내 본다.  사진 속엔 지금 보다 어리고 젊은 우리들이 있다. 특히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함께 여행도 갈 수 없는 친정엄마와 찍은 사진들이 덜컹 나를 슬프게 다.




 엄마는 차를 타고 낯선 길 위를 달리면 목소리부터 생기발랄해지고 소녀처럼 설레어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집안 여건도 분위기도 좋지 못했던 엄마에게 여행은 멀기만 한 책 속의 이야기고 사진으로 보고 마음으로 가 보는 그런 곳이었다. 철이 든 어느 날, 두꺼운 지도책을 열심히 들여다보시는 엄마를 보며 함께  여행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하고 한 달여 만에 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샀다. 신이 난 엄마와 나는 전국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틈만 나면 찾아다녔다. 서툰 운전인데도 우리 딸 잘한다는 엄마의 응원은 자꾸만 운전대를 잡게 했다. 그러다 엄마도 면허를 따게 되고 주차하던 엄마가 브레이크 대신 액셀을 밟아 벽을 들이박고 나의 첫 차는 오른쪽 헤드라이트를 툭 떨어뜨리는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우린 다친 곳이 없었지만 다음날 영주 부석사를 가기로 했기에 고민에 빠졌다. 당장 수리를 맡기자니 부석사가 너무 가고 싶었다. 엄마와 난 의논 끝에 테이프로 헤드라이트를 붙이고 여행을 감행했다. 가을 부석사는 눈이 부시게 예뻤고 우린 여행에 미쳤다며 마주 보고 깔깔거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덜렁대는 헤드라이트가 떨어질까 봐 마음을 졸였던 기억은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엄마와의 추억이다. 다만 아쉬운 건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지 않은 것인데, 다행히 결혼 후에도 일 년에 두서너 번씩 이어지던 엄마와의 여행이 사진 찍기 좋아하는 남편 덕에 차곡차곡 사진첩에 쌓여갔고 어느 날부터 앨범 대신 하드디스크에 저장되면서 남겨진 것들이 서랍 속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가끔 이렇게 서랍을 정리할 때면 만나게 되는 추억 자투리 사진들은 책갈피 속 말린 꽃들처럼 추억을 소환하는 힘이 있다.


 내년이면 내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선다. 마음은 20대 한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마다 뿌리 염색을 해야 하고 거울 속 들여다 보이는 얼굴엔 잔주름이 자리를 잡아간다. (왜 마음은 나이 들지 않느냐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손에 들린 사진 속엔 보성 차밭 싱그러운 초록잎 사이로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가 있다. 현역에서 활발하게 일하던 풋풋한 모습의 오십대다. 그 당시 첫아이의 외할머니시며 정년을 몇 년 앞둔 나이,  내가 체감하던 엄마의 오십 대는 노년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내가 그 나잇대로 진입을 하고 일흔을 훌쩍 넘은 엄마를 생각하니 오십 대는 나름 풋풋한 나이였다. 문득 엄마가 그리워져 휴대폰을 켜고 번호를 누르니 바싹 다가앉은 온기로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착 붙는다.


"서랍을 정리하다 예전 사진 보고 있는데, 엄마 오십 대 때 풋풋하고 참 아름답네!"

"언제 적 사진을 보는 거야?"

"초여름 보성차밭에서 찍은 사진 보고 있어.'

"아! 그때 참 좋았는데. 벌써 오래된 이야기네."

"맞아. 우리 보성 간지도 십여 년이 지난 듯 해. 의식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시간은 빨리 흐르고 뭉텅이로 사라지는 느낌이야.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다는 생각을 요즘 더 많이 하는 거 같아."

"맞다. 오늘이 소중하지. 이사 가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라."

"엄마, 코로나 때문에 언제 우리 집에 올 수 있을까?"

"당분간은 어렵겠지. 너희 집 보고 싶다."

"응. 사진이라도 찍어 보낼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일상의 그림이 달라진 요즘을 사는 우리들. 특히나 코로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 위협적이니 몸도 약하신 친정 엄마는 조심, 또 조심이 필수다. 일 년 중 기다리던 행사였던 엄마와의 여행이 중단되고 친정집 문턱을 넘지 못한 지도 2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간간이 내려가 야외에서 잠깐 얼굴만 뵙고 와야 하는 나날들. 자식들과 맛있는 식사시간을 즐기시던 엄마와  한 끼를 먹는 서러운 시절을 산다.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늘어만 가는 확진자 수.

자정이 넘은 시간  딸아이 반 친구가 확진을 받아 일차 검사 대상자라는 문자를 받았다. 지난달 고등학생 아들에 이어 두 번째다. 아침을 먹고 식구 모두 pcr검사를 받으러 공주로 갔다. 추위에 40여분을 기다려 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 차 창밖으로 보이는 금강은 묵직한 고요를 간직한 채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도 저 강물처럼 이시절을 흘러가야 하지 않을까! 불안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지 못하게 긴장되었던 마음을 이완하고 가만히 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 긍정의 스토리를 써나가야겠다.


"엄마! 건강 지키며 이 시절을 잘 지나 주셔서 감사해요. 또 지도책을 들여다보며 꿈꾸어야 할 시기지만 우리 여행은 곧 이어질 거예요. 사랑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조명등을 고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