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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Dec 23. 2021

말의 일각(一角)

오전 7시 30분. 남편은 회사 출입증과 마스크를 챙기고 집을 나서며 아이들을 깨운다. 아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딸은 아빠가 켠 전등을 끄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남편을 배웅한다. 어째 오늘 아침 느낌이 불안 불안하다.


아들을 흔들어 깨우니 학교를 안 가도 된단다. 개교기념일도 수능일도 지났는데 무슨 이유로 학교를 안 가도 된단 말인가! 아들 말은 축제 기간이라 안 가도 되고 피곤하다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아들이 어제 뭐했더라? 학교 다녀와서 저녁에 보컬 트레이닝받으러 다녀오고 그 후론 12시가 넘도록 게임하고 애니 본 걸로 알고 있다. 학교는 기본, 보컬은 취미생활, 게임과 애니는 오락...... 그리곤 피곤하다고 늘어져 잔다. 학교를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지만 아들보다 등교가 더 힘든 딸이 있으니 아들은 일단 미루고 딸을 깨우러 간다. 시간은 어느새 7시 50분이다.


딸 침대에 함께 누워 안아주고 장난치며 잠을 깨우고 겨우 일으켜 앉혔다. 어제 먹기로 한 콩나물 비빔밥을 어묵국이랑 차려주고 있는데 아들이 어슬렁거리며 나와 물을 마신다.


"오빠 오늘 또 학교 안 가?"

"우리 학교 축제야."

"축젠데 왜 학교 안 가?"

"안 가도 돼."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게 있어. 오빠는 고등학생이야. 너는 초등학생이고."

"근데 왜 학교를 안 가냐고! 나도 가기 싫다고. 오늘 노래 불러야 되는데 나는 노래도 못 부르고 가기 싫어. 오빠는 맨날 아프다 핑계 대고 학교 안 가면서 오늘은 축제라서 안 간대. 나도 학교 가기 싫어!"


아! 이런 아침은 정말 싫다. 아들은 방으로 들어가고 밥을 먹으며 딸은 투덜거린다. 시계를 보니 8시 15분을 지나고 있다. 딸의 숟가락질은 느리기만 하다. 알람이 8시 25분을 알린다. 이제 숟가락을 놓고 옷을 입어야 할 시간. 예민한 딸이 또 시간에 쫓겨 학교 안 간다는 소리 나올까 봐 밥을 먹고 있는 딸의 긴 머리카락을 빗겨준다. 이제 그만 먹고 옷 입으러 가야 할 시간 같은데 했더니 자기 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쿵쿵 방아를 찧는다.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딸의 뒷모습을 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32분. 갑자기 딸이 우는 소리를 낸다.


"벌써 32분이야! 30분에 나가야 된다고! 지금 가면 늦는단 말이야!"

"그럴 리가! 지금 바로 신발 신고 나가면 늦지 않아. 이러고 있지 말고 얼른 나가자."

"이미 늦었다고!"


그렇게 발을 굴리며 우는 동안 재깍재깍 시간은 흘러가고 어느새 35분이 넘어간다. 딸은 이제 가방을 벗어던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다. 나의 머릿속은 멍해진다. 우리 딸 머릿속엔 등교 안 할 핑곗거리가 수만 가지 필요하고 오늘 등교 안 할 마음의 계획은 언제부터 생겼던 걸까? 노래 부르기 수업이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님 어젯밤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아침 학교 가지 않는 오빠를 본 순간부터일까? 아 모르겠다. 어쨌든 8시 40분 등교 시간이 지나도록 우리 집 두 아이는 지금 집에 있다. 거실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춰 드는데 내 마음엔 암막커튼이 드리운다. 딸은 내가 담임선생님께 등교 못 할 어떤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인지 울고 있다. 나는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나의 초등 등굣길이 떠오른다. 우리 때는 지금처럼 아파트 단지 옆에 초등학교가 있지 않았다. 적어도 걸어서 30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학교를 참 부지런히 다녔다.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손발이 시려 퉁퉁 붓고 머리라도 감고 갈라치면 머리카락이 얼어서 고드름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학교는 가는 곳이었다. 가끔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들은 자기 생각이나 판단 없이 남들이 혹은 사회가 정해 놓았다는 이유로 학교를 가야 하느냐? 내가 하는 일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고 얘기한다. 초등 딸은 누가 학교를 만들었냐고!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데 심지어 평가도 한다며 따진다. 어릴 적 나는 그냥 학교가 좋았는데, 엄마와 아빠가 회사 가듯이 나는 학교를 갔는데...... 우리 아이들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구나! 이해하고 공감하다가도 그 적당한 선이 어딘지 몰라 또 불안해지고 머뭇거리게 된다.


8시 52분. 딸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와 우두커니 침대 옆에 서 있다. 참고 있던 말이 잔소리가 되어 터져 나온다.


"나는 지금 너의 이 행동을 선생님께 변명할 생각이 없어. 엄마 판단엔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선택한 거니 네가 해결해."


딸은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낸다. 내 마음에 불쾌함이 몰려든다. 이어지는 잔소리.


"왜 포기부터 하는 거야? 학교가 바로 옆인데 32분이면 40분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시간이야. 좀 늦었다 싶으면 뛰어가면 되잖아! 엄마는 30분 넘는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걸어 다녔어. 학생은 학생답게 학교는 가는 거야.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말고. 만약 아빠가 회사일이 힘들다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핑계 대며 안 간다면 우리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겠니? 너는 무슨 돈으로 입고 먹고, 배우고 할 거야? 살면서 해야 하는 일들은 그냥 하는 거야!"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두서없는 잔소리를 듣고 있던 딸이 휙 돌아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럴 때 지혜로운 말은 무엇일까? 속에 말을 뱉어내고 나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빨리 감정을 진정시켜야 하는데...... 딸 담임선생님껜 연락을 드리는 게 학부모의 도리겠지? 아들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지금 딸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나 또 불안한 거야?

순식간에 생각들이 엉켜버린다. 휴대폰을 켜니 아들과 통화를 했다는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문자가 와 있다. 딸 담임선생님께도 간단한 문자를 보내려 하는데 가방을 멘 딸이 들어온다. 머리가 아파서 조금 늦게 간다고 문자 보내줘. 지금 갈게. 그러곤 내 옆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다.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지만 몸을 일으켜 딸을 안아준다. 그래. 갔다 와. 문자 보내 놓을게. 딸의 온기가 나에게 전해진다.


8시 59분.

차창 밖으로 학교 가는 딸을 보며 커피를 내린다. 아침의 소란을 피해 아들 방 문은 꼭 닫혀있다. 한 달에 두서너 번씩은 겪게 되는 아이들 등교 전 갈등 앞에 나는 여전히 유연하지 못하고 덜컹 두려워진다.


대도 환경도 달랐던 일방적인 나의 경험을 보편화시켜 지금 아이들에게 주입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가? 오늘 아침 또 나를 붙드는 생각이다. 오늘 나는 아이들에게 너그러웠어야 하는지? 학교는 가야 하는 곳이라고 단호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었는지... 아이들을 믿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툰 아이들을 대신해 강압적으로라도 습관을 잡아주어야 하는 것인지. 소위 바른생활 양식에 벗어나는 아이들 행동을 볼 때마다 키워낸 거대한 불안 덩어리는 때로 두서없는 잔소리로 터져 나온다. 잔소리는 현상에 대한 반응이지만 내 무의식 속 불안이 쏘아 올리는 것이다. 학교 가기 싫다는 아이들의 말에도 이러한 내막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들은 무엇이 불편하고 두려운 것일까?


어쩌면 아이들은 끊임없이 학교 생활의 불편과 불안을 말하고 있는데 해결 방법을 모르는 나는 계속 학교는 가는 곳이다는 말만 되돌이표처럼 하고 있진 않았까? 결국 나와 아이들 사이에 필요한 노력은 경청일 것 같다. 지금 너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의 뿌리가 깊음을 배려하는 마음. 내 경험에 비추어 반대하고 싶어도 가만히 들어줄 수 있는 너끈함을 지니는 것. 아이들의 말을 듣는 엄마도, 엄마의 말을 듣는 아이들도 우린 서로 경청이 필요하다. 논어 위정편에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이라는 말이 있다. 글의 뜻대로 풀면 육십에 귀가 순해졌다는 것인데, 말을 하는 것도 귀로 듣는 것도 연륜이 쌓여야 하고 그 연륜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일 테다. 나에겐 더 노력할 시간이 있다. 오늘 아침 또 입을 다스리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하는 말의 깊은 뜻을 가만히 헤아려보는 엄마여야 함을 다시 새기며 아들과 마주 앉아 따뜻한 점심을 먹고 귀가할 딸을 기다려야겠다.


말의 일각! 지금 내 귀로 듣는 너의 말이 그 아래 큰 마음의 덩어리를 뚫고 나온 한 조각일 뿐임을 생각하며, 너의 한마디에 파르르 대는 엄마는 되지 말자. 오늘 내 마음에 새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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