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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Jan 03. 2022

나의 그림책

나를 빛나게 하는 소소한 기쁨


 국민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은 굵은 자물쇠로 닫혀 있었다. 그 당시 도서관은 학교를 구성하는 부속품이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도서관을 놀이터처럼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나에게 있었으니, 바로 엄마 찬스!

90년대엔 선생님들이 일직을 쓰셨는데 국민학교 교사셨던 엄마는 일직 서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다녔다. 나 또한 금단의 문인 듯 닫힌 학교 도서관을 열가지런히 빛나는 책들을 꺼내보는 희열이 있어 곧잘 따라나섰다.


 전 생애를 걸쳐 가장 즐겁게 막무가내로 책을 읽었던 때가 초등 시절이 아닐까! 세계 명작 동화, 위인전, 옛이야기, 탈무드, 공상 과학소설......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 세상에서 때론 슬프고, 행복하고, 두렵고, 감동적인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나의 우주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부담은 커지고 상대적으로 다양한 책 읽기는 어려워졌다. 대신 주옥같은 작품들이 가득한 국어 교과서를 통으로 외우며 겨우 좋은 글들과의 만남을 이어오다 성인이 되어서는 독서보다는 현실의 재미를 쫓아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내상 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꽉 막힌 세상을 경험했고 그 돌파구로 다시 책을 찾게 되었다. 주로 육아서와 아이 교육 관련 도서를 열심히 읽었는데, 그 책들은 한결같이 그림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림책이 드물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비해 우리 아이들 시대엔 출판사마다 전집으로 쏟아지니 두어 달에 한 질씩 책을 사들인 듯하다. 자연, 위인, 수학, 생활, 창작 그림책 등 골고루 서가에 채워놓고 틈날 때마다 아이들에게 읽어줬는데, 더러 내가 반해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 작품들도 있었다. 그중 내 마음 첫 번째 그림책이 <리디아의 정원>이다.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창 밖에 화분이 있어요!

마치 화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제 봄이 오기만 기다릴 거예요.

할머니, 앞으로 제가 지내며 일할 이 골목에 빛이 내리비치고 있습니다." <리디아의 정원> 중


 1930년 미국, 대공황을 겪으며 리디아의 시골집에도 실직과 생계의 위협이 닥친다. 어쩔 수 없이 리디아는 도시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가게 되는데, 빵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외삼촌은 딱딱함이 몸에 밴 무뚝뚝한 사람이다. 심술 난 사람만큼이나 말 걸기 불편한 사람이 무뚝뚝한 사람들인데 리디아는 그런 편견 없이 외삼촌을 대한다.


 포슬한 흙냄새와 싱그러운 채소, 과일, 꽃 가꾸기를 좋아하는 리디아는 그저 꽃을 심을 화분만 봐도 낯설고 차가운 도시에서 빛을 찾아내는 소녀였다. 리디아는 삼촌을 도와 빵 만드는 일을 거들고 학교를 다니며 깨진 화분이나 그릇, 케이크 받침에 꽃을 심었다. 리디아에게 원예를 가르쳐 주신 할머니는 철마다 꽃씨와 알뿌리, 흙들을 보내주고 리디아가 있는 곳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저 평범하던 빵가게가 향기로운 꽃들로 화사해지자 손님들도 북적였다. 당연히 외삼촌도 기분이 좋지 않을까?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미소는 없다. 리디아는 그런 외삼촌에게 웃음을 찾아드리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정성 어린 마음을 가득 담아 이벤트를  준비한다. 외삼촌이 오랜만에 쉬게 되는 독립 기념일 날, 오직 그만을 위해 몇 달을 공들여 가꾼 옥상 정원을 선물한 것이다.


 앞다투어 피어난 장미, 백일홍, 라일락, 달리아, 맨드라미 등 좁은 옥상이 여름의 기운을 가득 담은 꽃들로 뒤덮여 있다. 테이블엔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고 환영의 뜻을 담아 리디아와 직원들이 치르르 타오르는 폭죽을 흔들고 있다. 이 정원에 입장한 외삼촌은 깜짝 놀라 굳어 서 있는데, 나는 몇 번을 읽어도 이 장면에서 멈칫한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이 어린 소녀가 낯선 곳에 떨어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밝게 생활하는 것만도 기특한데, 꽃을 키운다는 소박한 재능이 나를 살리고 주변을 살리고 굳은 마음을 녹이는 것을 보면 언제나 눈시울이 뜨겁다.

리디아가 가지고 있는 빛의 힘에 놀라다 보면 슬그머니 나에게 질문이 찾아든다. 나는 어떤 빛을 지닌 사람일까?


 책을 좋아하던 내가 어느 순간 책도, 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리 부지런히 책을 읽어도 매일매일 신간은 쏟아지고,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은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좋아서 시간을 고 뭐라도 적을라치면 내 글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건 꿈의 저주라고! 치를 떨며 밀어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되어 경제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리디아가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할 때 오는 기쁨과 빛을 리디아는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외삼촌은 가게문을 닫고 리디아를 위해 특별한 케이크를 만들어준다.


 "외삼촌은 제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굉장한 케이크를 들고 나타나셨습니다. 꽃으로 뒤덮인 케이크였어요. 저한테는 그 케이크 한 개가 외삼촌이 천 번 웃으신 것만큼이나 의미 있었습니다."

<리디아의 정원> 중


 그 굉장한 케이크와 함께 전해준 편지엔 아빠가 취직을 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담겨 있었다. 역에서 리디아를 배웅하며 진심을 다해 꼭 안아주는 외삼촌이 그려진 마지막 장에서 또 울컥한다. 어쩌면 고단한 삶에 찌들어 웃음을 잃었던 외삼촌이 이제 빵 만들기의 순수한 재미를 찾고 즐겁게 일하게 되지 않을까! 빵을 만드는 그의 입꼬리에 미소가 얹히고 콧노래가 흘러나올지도 모르겠단 상상을 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고향으로 돌아 간 리디아는 사랑하는 할머니와 행복한 원예 아가씨로 살아간다.

 



 '0세부터 100세까지 읽는 그림책',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들', '그림책을 아이들만 보는 책이라 말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오해' 이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림책이 확 궁금하던 시절, 운명처럼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몇 년 열심히 그림책을 들여다본 듯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림책이 자기의 속내를 내보이기 시작했다. 겉모습에 가린 속 깊은 마음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림책이 나에겐 리디아의 꽃과 같이 를 밝히고 남을 밝히는 빛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그림책들을 소개해 주는 기쁨과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이웃과 그림책 모임을 시작했다. 다음 주 모임을 위해 좋은 책들을 고르고 들여다보며 내 안에 방울방울 젖어드는 소소한 행복을 맛보는 시간. 내가 빛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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