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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소영 Nov 23. 2020

두번째 강릉, 8년 만에

20.11.22 속초 14일차

속초에 와서 맞는 두 번째 주말, 처음으로 속초 밖으로 나갔다왔다. 며칠 전 강릉에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다는 게 급 생각나서 검색해봤더니 지난 여름 보고 싶었는데 못 봤던 <남매의 여름밤>이 상영중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예매했다. 간 김에 하나 더 봐야지 하고 <걸후드>도 예매했다. 1시에 <걸후드>, 6시에 <남매의 여름밤>이다. 그 사이에 <69세> 씨네토크도 있었는데 세 편을 연속으로 보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 패스했다. 그러고보니 종종 몰아서 세편 연속 본 적도 있긴 한데 이젠 못할 것 같다.


속초와 강릉은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한 시간 안에 도착하고, 7번국도로 가면 한 시간이 살짝 넘는다. 강릉으로 갈 때는 영화 시간에 안 늦게 고속도로를 탔고, 돌아올 땐 7번국도를 탔다. 김연수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7번국도>를 타고 돌아오면서 '와 내가 여길 달리고 있다니' 바다를 동쪽에 두고 달려본 적은 처음이기도 하고 뭔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지난 2주 간은 내내 속초에 있었으니 이번주엔 양양, 고성 등 속초 밖으로도 다녀볼 생각이다.


제주에서 20년을 살고, 스무살부터는 안산에 살면서 강원도와 동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해 지는 서해에 사는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면서도 해 뜨는 동쪽, 그리고 동해 바다가 늘 궁금했다. 그러고보니 강원도에 가 본 적이 두 번 있었다. 금강산에 두번 갔었는데(언제적이냐 그때가...ㅎ) 밤 열두시에 버스를 타 새벽에 고성에 도착해 금강산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했다. 그때는 거기가 고성인지도 몰랐고, 경유지였을 뿐 어두워서 아무것도 못 봤다.


오늘이 두번째 강릉이다. 처음 갔던 건 8년 전 여름이다. 그 해 7월에 아빠가 말기암 선고를 받아서 휴가 땐 당연히 제주에 가야하는데 그래도 혼자 어디라도 잠깐 다녀오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정한 목적지가 강릉이었다. 나의 첫 여름휴가, 첫 혼자 여행지였다. 강릉으로 정한 이유는 그 당시 읽고 있던 신영복 선생님의 <변방을 찾아서>에서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을 알게 되면서다.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숙소도 정하지 않은채로 그냥 떠났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 갔다가 초당순두부를 점심으로 먹었다. 커피거리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안목해변을 베이스캠프로 잡았다. 경포대에서 만난 분에게 '안목해변까지 걸어가면 멀어요?'라고 물었는데 '금방 가요. 여기는 우리 운동 코스에요' 하는 말을 믿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내리 두시간을 걸었다. 지금처럼 길찾기 앱도 없던 때였다. 그나마 왼편에 바다가 있고, 소나무 숲길이어서 걸을만 했던 것 같다.


안목해변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으려고 괜찮아보이는 데를 들어갔는데 하룻밤에 10만원이라고 해서 그냥 나왔다. 가다보니 민박이라 쓰여 있는 데가 있어서 갔더니 3만원이라고 해서 그냥 잡았다. 혼자 자기엔 꽤 넓고, 지저분하고, 브라운관TV가 있는 방이었다. 방에 짐을 풀고 나와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죄다 횟집밖에 없는거다. 그래도 식당에서 혼자 밥은 곧잘 먹는 편인데 횟집엔 차마 못 들어가겠어서 산토리니 카페에서 커피와 허니브레드를 시켜서 먹었다. 밤에 무서워서 TV를 틀어놓은 채 누웠는데 파도소리가 너무 커서 잠을 못잤던 기억이 있다.


<걸후드>와 <남매의여름밤> 사이 3시간 동안 8년 전에 갔던 곳을 가보기로 했다. 첫번째 영화 <걸후드>를 본 후에 잠깐 <한낮의 바다>라는 독립서점에 들렀다. 여행지에 있는 독립서점에 가는걸 좋아한다. 그래서 독립서점이 있는 곳이 여행지가 되곤 한다. 책을 한 권 사고,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 갔다. 그래도 두번째 왔다고 와 본 기억이 난다. 생가와 기념관은 간략히 둘러보고 소나무 숲에 오래 머물렀다. 바다를 등지고 서쪽으로 기울어져가는 해를 봤다.



지금의 나는 여행에 많이 능숙해졌지만, 첫 혼자 여행이었던 그때는 모든 게 낯설었던 것 같다. 허난설헌 생가에 갔으니 생가를 성실히 둘러보고, 기념관의 텍스트를 열심히 읽었다. 생가 뒤 소나무 숲을 볼 여유는 없었다. 혼자 걷기에 좀 쑥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다. 허난설헌 생가에서 경포대, 안목해변까지 걸으니 밤이 되었고, 다음날 아침 비가 많이 와서 바다를 둘러볼 새도 없이 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그야말로 찰나의 강릉이었다.


오늘은 초당순두부 대신 초당버거를 먹었고, 내가 걸었던 소나무 숲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안목해변까지 가는 사이 완전히 해가 질 것 같아서 송정해변에 들렀다. 동쪽에서 보는 노을은 좀 더 아련한 느낌이다. 안목해변은 예전엔 횟집과 카페가 반반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카페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쁜 카페도 많이 생겼고. 내가 묵었던 그 민박집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었다. 아마도 여기였던 것 같다. 내 저녁을 해결해줬던 산토리니도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두번째 영화 시간이 가까워져 다시 차에 탔다. 3시간 미션 성공이다.


2013년에는 아빠가 돌아가셨고, 단체 재창립, 사무실 이사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2014년에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면서 거기에 올인했다. 2015년 가을, 2주간의 프랑스 여행 이후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래도 나는 어리숙해서 추억이 많았던 8년 전 '첫', '혼자', '강릉' 여행에 감사함이 크다.


첫 떠남이 있어서 두번째, 세번째가 있을 수 있었고, 여행력은 조금씩 업그레이드 됐다. 뭘 많이 봐야 하는 여행에서 잠시 멈추는 여행으로, 돌아다니는 여행에서 머무는 여행으로 달라졌다. 지금의 나와 비교할 수 있는 그때의 나가 있다는 것이 좋다. 확신이 부족했던 30대 초반의 나는 그래도 조금은 단단해져서 마흔을 맞았다. 현장으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달리겠지만 종종 어설펐던 나를 떠올리며 숨 고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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