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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소영 Nov 13. 2020

속초에서 한달살기를 시작했다

2020.11.11

빼빼로데이라고도 하고, 농업인의 날이라고도 하던데 나에게는 속초에 온지 삼일째 되는 날이다.


지난 월요일부터 한달간 속초에 머문다. 그러기로 한 지는 꽤 되었다. 봄부터 사무국 동료들과 안식휴가에 대해서 의논을 했고, 여러 사업들이 마무리 되는 11월이 좋겠다고 같이 결정했다. 5년 전 '2주간의 안식휴가'도 11월이었다. 청년아카데미 졸업식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 비행기를 탔다. 휴가 하루 전날이자 청년아카데미 졸업식 날, 그러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항공사로부터 조종사 파업 소식을 전해듣고 멘붕에 빠졌었다. 항공사 측에서 아시아나 직항으로 비행편을 바꿔준 덕분에 나는 무사히 파리에 도착했고, 조종사 파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음해부터 일하고 있는 단체에서 대표를 맡기로 동료와 논의를 마친 이후라 다들 그 여행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고,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떠나긴 했다. 여행은 즐거웠지만 대표로서 어떻게 해볼 것인가 그런 구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매일 글을 쓰겠다는 다짐 또한 산산히 부서졌다. 그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은 수천장의 사진과 다음 여행으로의 부추김이다.


이전까지 여행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정확히 말하자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일어난 엄청난 변화였다. 그 날 이후로 언제든 떠날 궁리를 했고, 자주 여행을 다녔다. 남해안은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니스 바닷가에 앉아 여기가 지중해구나 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은 가본적 없으면서 루브르 박물관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던 내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남해안도, 국립중앙박물관도 아직 못 가봤지만 국내 여행도 종종 다녔다. 늘 신상에 관심이 많은 나는 희한하게도 여행은 갔던 데를 여러번 가곤 했다. 경주와 군산, 태안에  자주 갔고, 이 곳 속초에 제일 많이 왔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여행지에서의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어떤 풍경을 봤을 때,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밥을 먹을 때 머물렀던 그 마음들 말이다. 늘 일상이 분주해서였을까 여행하는 동안은 오히려 머물고 싶었나보다.


속초는 나에게 '잠시 멈춤'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해가 지는 서쪽에 사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면서도 해가 뜨는 동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속초에 올 때마다 일출을 본 적은 없다. 언제나 생각만 앞서는 나다. 기사에서 우연히 본 '동아서점'은 언제나 또 가고 싶은 교토의 '게이분샤 서점'을 떠올리게 했고 그것이 내가 속초에 처음 오게 된 이유다. 속초에 올 때 마다 머무는 '완벽한날들'과의 인연도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짧으면 이틀, 길어봐야 삼일 정도 머무는 것이 대부분인데 늘 가는 곳은 동아서점, 등대해변, 등대전망대 앞 바다, 영랑호다. 매번 먹는 건 완앤송의 쌀국수, 속초중앙시장의 순대국이고. 다들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가 밤 늦게 들어오는데 나는 주로 카페에서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잤다. 나에겐 그게 여행이다. 잠시 쉬고 싶어 떠나는 일. 휴가가 결정되고 난 뒤 나는 주저없이 속초를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내 고향인 제주에 가지 않냐고 했지만, 미안하게도 제주는 나에게 마냥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집에 있으면 맘껏 하고 싶은데로 하지 못할 것이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문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엄마에게 미안함이 들 것 같아서 말이다.


숙소를 8월에 예약하고는 주변에 요가원이 있는지 찾아봤다. 6월부터 사무실 아래층에 있는 요가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일주일에 겨우 한두번 밖에 가지 못했다. 속초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말고 한달 동안 다녀보자고 생각했다. 그럼 좀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검색해보니 영랑호 앞에 요가원이 있었다. 영랑호를 바라보면서 요가를 한다니... 당장 전화를 걸자니 3개월 전에 상담을 하는건 아무래도 오바인 듯 싶어 참고 참다가 속초 오기 삼일 전에 전화로 상담하고 예약했다. 속초에서 한 달 동안 뭐 할거냐고 많이들 물어봤다. 매일 요가하고, 밥 해먹고, 책 읽고, 글 쓰고 싶다고 했다. 월요일엔 늦게 도착해서 짐 정리하고 TV만 봤다. 때마침 두산vsKT 플레이오프 1차전을 하고 있더라. 어제는 아침 요가하고, 늘 먹고 싶었던 완앤송 쌀국수로 점심 먹고 집에 와서 일을 좀 하다가 학무정에 다녀왔다. 4월에 갔을 땐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 같았는데, 이번에 갔더니 가을이 끝난 것 같더라.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앙상하고 쓸쓸한 풍경이었다. 이마트에 들러 먹거리들을 샀다. 된장국을 끓여야겠다고 이것저것 재료를 샀는데 정작 된장은 빠뜨렸다. 어쩜 나는 한결같이 나인지...


설악산이 보이는 영랑호


오늘은 아침 요가를 하고, 마트에 가서 된장을 샀다. 집에 와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감자볶음도 해서 점심을 먹었다. 밥하고,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두시간이 지나 있었다. 매일 매일 밥 해먹자 했던 다짐이 흔들렸다. 그런데 어쩌나... 매일 밥을 해먹겠다는 포부로 어제 오늘 잔뜩 장을 봐서 냉장고가 한 가득이란 말이다. 여기에서만큼은 사온 채로 뒀다가 그대로 버릴 수는 없지 않겠나. 오늘도 점심 먹고 일을 좀 했다. 아마 내일은 안해도 될 것 같다. 빨래를 돌리는 동안 잠깐 낮잠을 자고, 그래도 속초에 왔는데 바다는 봐야지 하면서 집 앞에 있는 속초해변에 잠시 다녀왔다. 해변 가는 길에 있는 또 하나의 애정밥집인 우동당 문이 닫혀 있는걸 봤다. 팔 수술을 해서 영업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함께 먹으러 왔다가 반해버린 송미에게 이 소식을 전해줬더니 무척 슬퍼하며 우동당 사장님의 쾌유를 빌더라. 따뜻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느새 저녁 밥 먹을 시간이다. 어쩜 쉬는데도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걸까. 점심에 먹었던 것들을 그대로 꺼내 먹었다. 보리차를 끓였고, <복자에게>를 읽었다. 그러고 나니 열두시가 넘어버렸다. 낼 아침에도 요가를 가야하니 얼른 마무리 하고 자자. (현재 2:47)


해질 무렵 속초해변


이 얘기만 하고 자야겠다. 속초에 오기 전인 9월, 10월이 힘들었다. 이제껏 경험했던 고통 그 이상의 시간들이었다. 후회와 원망, 자책과 분노로 가득찼었다. 애초에 이 휴가를 계획했던 시점에 나는 대표를 올해까지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동료들과 사업을 잘 마무리짓고, 그들을 격려하며 떠나오는 것이 나의 그림이었는데 힘들었던 내 마음을 치유하러 온 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동료들을 격려하기는 커녕 예민한 나를 오히려 위로해준 그들에게 미안함이 컸다. 오늘 요가는 '아디다스'였는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거였는데 아디다스에서 하체 강화를 위해 만든 시퀀스라고 했다. 꽤 힘들었다. 버티고 있는 내내 온 몸이 후들후들 주저앉고 싶더라. 문득 생각했다. '지금 내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이 요가 동작이라니... 그것밖에 없다니... 그 고통의 시간들을 내가 통과했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구나' 감개무량했다.


산요가 요가원에서 바라본 영랑호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그게 무엇이든 시간은 흐르고, 나는 어떻게든 해내고, 그 고통은 끝이 난다. 그리고 또 다른 고통이 자연스레 온다. 고통이라기 보단 미션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고통은 과정에 따라붙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결국 조금은 더 단단한 사람이 된다. 우선은 내일 아침에 잘 일어나는 것, 내일의 요가를 해내는 것 그것이 내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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