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4 속초 6일째
속초한달살기 계획 중 1순위는 요가였다. 속초에 있는 요가원들을 검색하고, 그 중 영랑호 앞에 있는 산요가에 등록했다. 월요일 저녁에 속초에 도착했기 때문에 화요일부터 어제까지 4일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요가원에 갔다. 겨우 4일을 간 것인데 나에게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 엄청난 셀프 격려를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여기서는 요가 말고는 할게 없기 때문에 매우 가능성이 높은 미션이긴 했다. 그래도 칭찬해!
속초에 오기 전, 6월부터 사무실 아래층 요가원에 다니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요가원 운영을 안할 때 빼고는 나름 일주일에 두번은 꼭 가려고 했다. 그때도 역시 '겨우' 두번이지만 나를 기특해했었지. 추석연휴가 끝난 10월은 진행중이던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 그 핑계로 요가는 패스했었다. 드문드문 공백이 있었으나 '요가'는 아직까지는 현재진행형이다.
내 삶의 대부분은 ' 중도 포기'의 연속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 계획을 엄청나게 체계적으로 잘 세워서 '계획의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그대로 실행한 적은 거의 없다. 대학때는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교내에서 판매하는 영어교재를 샀지만 펼쳐보지 않았고, 지하철로 40분 가야하는 영어회화 학원에 무려 새벽반으로 등록했다가 두 번정도 가고 포기했다. 그때 같이 다녔던 오빠는 아무리 전날 술을 마셔도 빠지지 않고 학원에 가더니만 삼성전자에 들어갔다. 삼성전자가 부러운 건 아니고, 그 오빠의 의지가 부러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조급함과 절박함이 의지를 만들어낸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때 난 영어점수를 요구하는 취업 준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단지 중학교 때 새벽에 학교가기 전 영어회화 학원에 가서 원어민과 대화하는게 재밌었던 추억이 있었을 뿐.
헬스장은 기본이 3개월이라고 사무실 동료들과 함께 등록했지만 하루 갔던가? 우리 단체 회원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일해서 그 센터 캘리그라피를 등록했는데 그건 아마도 두 번? 그나마 수영은 한 달은 갔다. 집 앞에 수영장이 있었고, 어릴 때부터 물을 좋아해서 아침에 수영장 가는건 좋았다. 첫 한 달은 월수금 3일을 빠지지 않고 갔다. 그런 내가 기특해 페이스북에 자랑하듯 썼던 기억도 있다. 여름 휴가로 공백이 생기면서 리듬이 깨졌고, 그렇게 수영장도 빠이빠이. 나중에 다시 등록했을 때는 간 지 하루만에 피부병이 심해져서 그만뒀다. 아직 수영은 미련이 남아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내년에 다시 오픈한다고 하더라.
이런 나를 보면서 끈기가 없다고, 지구력이 부족하다고 자책을 많이 했었다. 근데 그걸로 끝. '역시 난 안 되나봐'로 끝이 났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지속하고 있는 것은 '일'이다. '일이니까 당연히 해야지,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기엔 내 '일'이 좀 복잡하다. 먹고 살려면 하면 안 되는 일이니까. 내 일은 시민단체 활동가다. 그 중에서도 다들 색안경을 끼고 보는 통일단체 활동가다. 막상 안에 들어와서 보면 '평화협정체결, 남북관계 개선' 등 뭔가 어려운 원칙적 구호를 말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통일단체라고 해서 맨날 임진각에 가거나 청와대에 가지 않는다. 통일은 정치적 구호라기 보다 다양성을 보장하는 통합적 삶의 결과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꽤 오래 걸릴 일이고, 내 일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마음들이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선입견 없이 북한을 보게 할 것이고, 또 각자의 삶을 건강하게 살게 할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노동자들의 삶에 연대, 다양한 평화인권기행 기획, 북에 대한 객관적 정보 전달이 다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일을 한 단체에서 12년째 하고 있다. 이 기간 중 절반은 흔들림의 시간이었다. 다른 일을 하면 월급도 많이 받고,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도 간편할텐데 말이다. 그냥 남들처럼 살 걸 왜 이러고 있을까. 함께 하던 동료들이 많이 떠났는데 나는 떠나지 못했다. 처음엔 차마 못하겠다고 말하지 못해서였고, 이후엔 나에게 중요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세월호참사를 겪으면서는 사회운동에 대한 당위성을 넘어 '사람'에 대해 좀 더 고민하게 되었다. 머리로 하던 일들이 가슴으로 내려왔다고 해야할까. 40대가 되어서는 같은 길 위에 있되 다른 일을 해보려고 구상중이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하고 싶은 게 계속 생겨난다는 거다.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삶이 기계 같다는 누구의 고백은 안타까우면서도 내 삶에 더 확신을 주었다.
행복해도 스트레스는 있다. 나와 타인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지만 하다보면 부딪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이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서 늘 분노한다. 2년 전 3월에 오른쪽 종아리에 통증이 왔다.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는 건 이사 준비를 하면서 이케아에 갔다가 걷지 못하겠어서 쇼룸의 아무 소파에나 앉아서 한참 있었기 때문이다. 큰 맘 먹고 한의원에 갔다. 당시 젊은 활동가 여럿의 부고를 받은 때였다. 한의사는 하반신 순환이 안 되고 있다고 했다. 통점을 누르는데 너무 아파서 기절할 뻔. 스무살에 독립해서 자취생활 한 이후로 생리가 불안정하다. 생리를 안하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차리리 편하다고 철없게 생각했었다. 나를 돌보지 않은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통증으로 터져 나온거다.
한의원에 처음 간 날, 침을 맞고 누워있는데 눈물이 났다. 내 몸은 이렇게 방치하면서 뭘했나 싶어서. 그 이후로 한의원에 제법 꾸준히 다녔다. 거의 매일 가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 한의원은 나에게 찰나의 쉼 같은 거였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위로 받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집중해서 치료하면 좀 나아졌다가 심해졌다가를 반복하다가 올해 들어서는 좀 많이 아팠다. 5분만 걸어도 통증이 종아리에서 시작해 엉덩이로 전해오고, 발이 저린다. 운동은 안해도 밤에 산책하는 건 좋아했는데 5분만 걸어도 아프니까 산책도 아예 포기했다.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운동을 하면 몸이 아픈 이 모순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시작한 게 요가다. 요가는 제자리에서 하는 거니까. 몸의 밸런스를 맞춰준다고 하니까. 막상 해보니 이런 유산소 운동이 없다. 그래서 요가에서 호흡이 중요한가보다. 요가 앞뒤로 명상을 하는데 한번도 딴 생각 없이 명상에만 집중한 날이 없다. 요가 끝나면 뭘 해야하고, 또 뭘 해야하고, 걔는 왜 그렇게 말했더라, 나는 왜 그랬지.. 머리 속은 대환장 파티다. 그러다가도 요가 동작을 할 때엔 딴 생각이 안 난다. 제대로 따라하는 동작은 없어도 강사님의 목소리와 내 몸에 집중하게 된다. 처음엔 들리지 않았던 요가 자세들이 들린다. 수리아나마스까라, 아르다우따나, 타다아사나 등등등. 아직 숨쉬는 법도 동작도 헷갈리지만 말이다.
요가쌤은 나를 비롯한 초보자들을 위해 천천히, 세심하게 알려준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어렵지 않으면 요가가 아니에요. 그래서 수련이라고 하는 거죠. 시간이 필요한 일이에요"
요가를 시작하면서 마음 먹은 게 있다. '안 되도 하자. 꾸준히 하면 언젠가 되겠지.' 이건 내가 단체 활동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기도 하다. 가치지향적인 일을 하겠다고 이 바닥에 들어오긴 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시도 했다가 망한 사업도 많다. 근데 10년을 꾸준히 하니까 하면서 보이는 것들이 생기고, 한번 성공하면 그게 또 자신감으로 연결되서 두번째, 세번째로 나아가게 되더라. 이걸 알고 난 후 요가를 시작하니까 잘 못하는 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다음엔 좀 더 괜찮아질거야.' 원숙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조급해지지 않는다는 거 아닐까. 그렇게 흔들림은 축적된 경험을 쌓아올려 단단함으로 변한다.
내 일이 그랬듯 요가도 나에게 그렇게 될 거다. 무엇보다 나는 건강해지고 싶다. 원없이 걷고 싶다. 5년 전에는 파리, 지금은 속초, 5년 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고 싶다. 몸이 건강해야 너그러워진다. 동료들에게 폐끼치는 예민함이 사라진다.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내일을 생각할 수 있다. 영어학원 새벽반에 빠지지 않았던 그 오빠의 의지가 지금 내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