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고 있던 감정은 ‘진짜 감정’이 맞는 것일까?
초등학생 때, 좋아하던 여학생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있다. 실패한 짝사랑이어서가 아니다. 원래 좋아하던 애가 있었는데, 다른 아이가 자꾸만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열 살이 조금 넘은 꼬마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바람둥이인가?’
경직된 도덕률에 길들여졌던 탓이다. 관습과 미디어는 ‘일편단심’을 미덕으로 칭송했다. 특히나 어릴 적의 통속 드라마들은 이별이나 이혼을 요구하는 자를 악인으로만 묘사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야 내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 그 꼬마는 또 다른 감정에 직면한 적이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와 술을 마시던 중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애가 내 여자친구면 좋겠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 후배가 나쁜 여자였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좋아하는 상대를 눈 앞에 두고도 ‘비슷한 누군가’를 찾았던 것이다. ‘이런 애’가 바로 앞에 존재했음에도 어리석게 ‘이런 애’를 찾아 헤맸다. 그 후배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자, 아는 사람의 전 여친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모종의 자기검열 속에 가뒀고, 감정의 실체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쩌면 의미 없는 제 3자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기도 하다.
우물 안의 감정이다. 난 하늘을 동경하고 사랑했지만, 그 하늘은 우물 입구의 크기에 불과했다. 우린 과연 우리의 감정을,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꿈꾸는 ‘로맨스’는 내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 말문도 트지 않은 갓난아기일 때부터 수많은 대중 미디어를 통해 ‘로맨틱한 연애와 결혼’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접한다. 그러다 보면 연애 감정은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순백의 드레스와 장미꽃과 같은 시각적 상징도 동원된다. 그러면 감정은 그러한 로맨스의 순간, 그 이미지에 반응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은 무엇인지 찾기 어려워진다.
정형화된 제도 또한 이미지 안에 감정을 가둔다. 사람들은 ‘연애’라는 감정을 꿈꿀 때, 곧잘 ‘결혼’이라는 제도를 연상한다. 그러면 관습적 제도의 울타리가 감정의 확장을 가로막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결혼하는 것인지, 결혼을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해진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결혼이라는 로맨틱한 순간을 꿈꾼다. 예식장에 어떤 사람이 신랑신부로 입장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연애와 결혼’ 그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들도 커다란 장벽이다. 수많은 제 3자들이 연인에게 오지랖을 편다. 한쪽의 집안 환경이 열악하다고, 한쪽은 초혼이고 한쪽만 재혼이라고, 학벌 차이가 난다고, 키가 작다고, 외모가 별로라고, 국적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나이 차가 많다고, 월세 산다고, 차가 없다고, 전라도라고, 경상도라고, 그냥 왠지 안 맞아 보인다고. 당사자 둘이 서로 좋다는데 무슨 말들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연애와 결혼을 정서적 결합이 아닌, 조건 맞춤에 의한 경제사회적 결합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럴거면 결혼을 로맨틱한 핑크빛으로 포장하는 짓이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갖가지 조건을 다 따진 후에 핑크색으로 색칠한다. 그리고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감정은 솔직한데 이성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감정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이성이 눈치채지 못하는 셈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쌓아 놓은 벽에 갇혀 ‘진짜 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우물 밖으로 나가보면 눈이 휘둥그레질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앞서 얘기한 개인적 에피소드들 이후로 ‘두 번 다시 나 자신에게 속지 말자’고 마음 먹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감정의 실체를 속속들이 잘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에 비해 조금 덜 속는 정도라고 느끼고 있다. 나와 교감하는 상대방 역시 속고 있을테니, 우린 아직도 서로 거짓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이 많을 것이다.
고정된 개념, 제도, 풍습 등에 길들여진 세상은 본연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힘들게 만든다. 모든 벽을 허문 뒤에야 볼 수 있는 감정의 실체, 그를 만나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