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소설)
나에게 7월이 이럴 줄은 몰랐다.
새로 옮겨서 여러 모로 부침을 겪은 한 학기였는데,
이제 좀 1학기를 마무리하려나 싶었으나
7월에 학폭이 연이어 일어났다.
“나, 학폭 때문에 미치겠어요”
이러면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반 아이(혹은 학부모)가 힘들어하는가 보다 생각한다.
우리 반 아이는 전혀 아니고,
내가 1학기에 담당하고 있는 ‘학폭’ 업무상 만나는 학부모와 아이들이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 학부모다.
대체 ‘학폭’ 업무는 왜 학교에서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늘 들지만
학폭 업무를 해보니
이 속엔 인간이 가진 욕망, 자존심, 원망, 불신, 억울함 등이 활활 회오리처럼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공통적으로 느낀바 ‘회오리 속에는 어른이 없다’.
사실 나는 20년 차에 처음으로 학폭업무를 맡았다. 그것도 처음부터 내 업무가 아니고, 업무담당자의 병가로 인해 그 기간만큼 내가 맡게 되었다. 학폭이 이제는 덩어리가 커져 소송과 법률 다툼까지 발전한 마당이니 누가 맡아도 부담스런 업무다. 나 역시 4월부터 넉 달째 업무를 담당하면서 현재 3호, 4호 사안을 처리 중에 있다.
전년도 업무담당 선생님께서 학폭은 매뉴얼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아아,, 매뉴얼,,
이 매뉴얼이 책 한 권인데, 주로 업무 절차와 서식을 안내한다.
학폭 한 건 터지면 서로 간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전제 하에 공문만 다섯 건이다.
사안 접수는 48시간 이내 등등 공문상으로 지켜야 할 시간과 절차 파악도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진짜 어려운 건 관련학생 학부모와의 통화다.
이건 뭐 매뉴얼에도 안 나온다. 이들과 통화하면서 내가 학부모들의 감정쓰레기통이 된 기분 때문에 사안 처리 내내 멘탈이 반쯤 나가있다. 멘탈이 나가니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책 쓰기, 공부하기 등등 생활 루틴도 무너졌다. 이런 악순환이 담임으로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오은영박사님이 나오는 금쪽같은 내새끼를 거의 챙겨보는 편이다. 이번 주 금쪽이는 놀라울 정도로 올해 옆반 아이와 싱크로 100%에 가까웠다. 학교에서 어떻게 지원하고 있는지 보면서 우리 학교에서 한 것과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아이, 부모, 학교의 역할을 면밀히 봤다. 역시나 부모의 양육방식, 훈육의 부재가 문제다. 부모의 올바른 훈육의 부재는 학교 현장에서 가장 많이 겪는 문제에 대한 원인이다. 단, 학교 선생님들은 오은영박사님처럼 단호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한다. 진짜 학교마다 오은영박사님이 로봇처럼 있어야 할까…
이번 주에 무너진 멘탈 붙잡고 있느라 해야 할 공부, 글쓰기를 제대로 못했다.
제대로 못했다면 주말이라도 재정비를 해야 하는데 회복하기가 좀 힘들었다.
그래서 손에 잡은 책이 김연수 작가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였다.
사실 요즘처럼 멘탈이 나갔을 때 내가 늘 하던 셀프 솔루션은 자기 계발서를 읽은 거였다.
그런데 소설집을 손에 쥐다니 내 언어체계, 사고체계에도 변화가 있나 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단편소설집이다.
지금처럼 뭔가 손에 잡히는 게 없고 현타에 멘붕을 느꼈다면 단편소설이 딱 적절하다.
이해 안 되는 번역본의 고전을 손에 잡았다면 머리를 쥐어뜯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1999년으로 시작한다.
나도 함께 잠시, 추억소환해본다. 1999년 나는 고3이었다. 더운 여름, 버스를 타기에 애매한 거리였던 고등학교는 오르막 제일 위에 있었고, 우리 집에서 20분 정도는 걸어야 했다. 해마다 그렇다지만 1999년 여름은 왜 그리 더웠는지…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보다는 불안이 더 앞섰던 그 해,, 소설 속에서는 세기말 현상을 여럿 소개했지만 내 기억엔 오로지 00학번으로 대학에 가야만하는 고3 입시기억뿐이다.
소설 속엔 2019년에 부부가 된 1999년 연인이 나온다.
또, 이야기 속의 이야기 [재와 먼지]가 나오는데 이 내용이 흥미롭다.
(어느 연인이) 동반자살을 하는 그날이 인생의 첫날이 되고,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이 찾아오고,
둘은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알고선 과거의 시점에서 다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어느덧 평범한 미래를 맞이한 2019년 부부에게 1999년은 흔들리고 불안한 시간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들이 2019년에 일어난 평범한 미래를 미리 알았다면 1999년 역시 그리 불안해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덧붙여 [이토록 평범한 미래] 251쪽, 해설 부분을 그대로 옮기자면(깔끔 정리)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 번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첫 번째 삶,
과거를 기억하며 거꾸로 진행되는 두 번째 삶,
그래로 두 번째 삶이 끝나고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세 번째 삶.
그런데 이 세 번째 삶은 첫 번째 삶과는 다르다.
그 안에 미래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란 표현이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미래를 기억하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조금씩 내 미래를 기억하려고 애써본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모여서 책도 나올 것이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공부를 통해 나는 약간의 달라진 환경 속에서 교직생활을 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래가 이렇다면, 나에게 먼 미래는 어떨까? 20년 뒤??
20년 뒤면 나는 정년퇴직할 나이가 되고, 우리 아이들은 모두 제 앞가림을 하고 있겠지.
막둥이도 27살이다. 오예!!
지금은 어렴풋이 정년할 때가 되면 동네에 단촐한 북카페를 해야지 하는데
북카페에서 평범한 오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20년 뒤, 내 인생은 다이나믹한 큰 변화보다는 자연스런 노화에 걸맞는 풍광으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시간의 재구성!
평범한 미래에서부터 출발한 나의 현재, 오늘 하루는 내 멘탈이 단단하든 부러졌든 간에 지나가는 시간, 딱 그만큼의 의미뿐이다.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밤, 내 다이어리에 내일 학교 가서 해야 할 일을 적으면서 ’내일 참 학교 가기 싫다‘ 생각을 해봤다. 이 생각을 이겨내는 방법은 어제 읽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 소설이 준 선물을 풀어내는 것 밖에 없었다. 글쓰기..
오랜만이다. 소설 속에서 멘탈을 잡아야겠단 자기 계발을 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