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살, 그 때 아빠의 사정과 우리 집 형편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 구조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엔 집 하나를 반으로 나눠서 세를 주었다. 얼마 전에 다시 가보니 그 작은 집을 어찌 둘로 쪼갰을까 싶지만 내가 살았던 30년 전에는 이런 집들이 수두룩했다. 쪼개기 전에도 작은 주택에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씻는 공간이 나오고 소파가 자리잡은 작은 거실이 있다. 거실을 몇 발자국 통과해야 안방으로 들어가고 안방을 통과해야 이름만 내 방인 내 책상과 책장, 냉장고로 꽉찬 방이 나온다. 그 방을 통과하면 부엌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옛날 주택의 구조이지만 네 식구가 속닥속닥 얼굴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타워형 구조로 집 안에 긴 복도가 있고 각자 방이 하나씩 있다. 문 닫고 각자 방에 들어가면 뭘 하고 사는지 얼굴 한번 볼 수 없고 목소리 한번 들을 수 없다. 한번씩 옛날 불편했던 집 구조가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집이 다시 보고 싶어서 차를 몰고 가본 적이 있다. 온 세상이 재개발이니 뭐니 해서 다 바꼈는데 그 집은 아직도 똑같은 모습이다. 얼마나 안 바뀌었냐면 지자체에서 그 마을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장옥거리'로 만들어서 벽화를 그려놓고 옛모습을 보존한 문화재처럼 만들어놓았다.어린 마음에 이렇게 한적하고 좋은 집도 없이 작은 집들만 따닥따닥 붙어사는 이 동네가 너무 싫었다. 초등시절, 시내 군인 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어서 함께 학교를 마친후 버스를 타고 집까지 걸어온 적이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집에 도착하지 않아서 대체 언제 너희 집에 도착하냐고 친구가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어린 발걸음으로 15분 정도 걸어들어오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바다 냄새가 쫙 깔려 있는 그 곳, 내 어린 시절을 그대로 담고 있는 말없는 바다는 아직 그 때처럼 잔잔하게 있을 것이다.그 때 집이 싫었던 이유는 못사는 동네도 한 몫 했지만 부모님이 너무 싫었다. 두 분은 매일 돈돈 하며 싸우는 게 일상이었고 그 사이에서 눈치가 빤했던 나는 어서 빨리 커서 돈을 벌어보고 싶단 생각만 가득했다. 몸은 열두살, 눈치나 정신적으론 이미 애어른, 그런 나였다. 빨리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에 어떤 날엔 스케치북을 챙겨들고 바다를 그렸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떠나겠지만 이 바다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최우수상이라 쓰인 상장을 받아온 날이었을테다. 뿌듯한 마음으로 구겨지지 않게 고이 가방에 넣어온 상장을 집에 오자 마자 아빠한테 보여드렸다.
"아빠, 나 최우수상 받았어”
“어, 우리 딸래미, 뭐 필요하노? 아빠가 사달라고 하는 거 다 사줄께"
'치, 지키지도 못하는 말만 맨날 하네'
축하한다는 세련된 표현 따위는 몰랐던 아빠에게 그저 축하의 의미는 원하는 걸 사주겠다는 거다. 알고 있었다. 아빠에게 큰 걸 바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축하해주고 싶은 아빠와 축하를 받고 싶은 딸은 집 앞 부식가게로 갔다. 가게 입구 큰 아이스크림 통 안을 살펴본다. 가격 싸면서 내가 좋아하는 하드가 뭐였더라 아이스크림통을 열어본다. 시커만 색깔 비비빅 수십개가 줄지어 가지런히 놓여있다. 비비빅 하나를 손에 쥐며 말한다.
"아빠, 이거면 돼"
아빠한테 기대할 수 있는 건 딱 비비빅 정도라는 걸 알았던 나였다. 그래도 그 때 조금 더 아빠 마음을 살펴볼 생각은 왜 못했을까 하며 약간의 자책도 해본다. 어쩌면 열 두살의 내가 원했던 건 멋진 축하선물을 사주는 거 보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같은 아빠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 때엔 아빠 역시 세상의 울타리 속에서 분주하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을터인데 딸은 그저 우리 아빠는 능력이 없어서 '안돼!' 하고선 선을 그어버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이런 날씨에 잔잔한 바다는 더욱 빛난다. 용기 내어 아빠한테 내가 먼저 전화 한통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