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흐밀 흐라발
갈등이 사람을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수 있을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인 보흐발 흐라발은 밀란 쿤데라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가 체코를 빠져나와 혁명을 맞이했다면, 보흐발 흐라발은 체코 안에서 혁명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밀란 쿤데라가 오래전부터 인기 작가로 이름을 날린 방면, 보흐발 흐라발은 최근에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 역시 시선을 끈다.
동시대 태어나 서로 비교가 된 예술가들은 몇몇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그러했고, 반 고흐와 고갱이 또 그러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와 보흐발 흐라발은 앞서 말한 두 경우랑 비교해도 상당히 다르다. 그러면 도대체 왜 보흐발 흐라발이 밀란 쿤데라와 비교되는지 그의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살펴보며 이야기해 보자.
화자인 한탸는 삼십오 년 동안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해왔다. 단순히 일만 한 건 아니다. 폐지 더미는 그의 일터이자, 집이자, 보물 창고이며 그의 모든 것이었다. 정확히 그의 일은 버려지는 책들을 압축해서 버리는 일을 한다. 단순한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나름의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 삼십오 년 동안 같은 일을 해왔기에 그만큼 숙련되기도 했고, 그 일은 어느 순간 그를 정의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한탸는 책을 압축하는 일을 하면서도 하나의 취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자기만의 컬렉션을 만드는 거다. 그 속에는 괴테나 플라톤 등 여러 철학서들도 있다. 한탸는 버려지는 책들을 보면서 조금씩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폐지를 압축하는 일 말고는 전혀 할 일이 없는 환경 속에서 책은 또 다른 세상의 빛이 되어 버린 거다. 그래서 한탸는 책을 탐닉하게 된다.
한탸가 살고 있는 세상은 스탈린 슬하의 사회주의 체제가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 속에서는 출판은 물론 이미 나와 있는 책들마저 사전 검열을 받으며 통제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앞서 말했던 한탸는 버려진 책들을 압축해서 버린다. 즉, 그 책이 의미하는 바는 버려지는 지식이며, 버려지는 사상이다. 정확히는 통제된 사상이 맞다. 한탸는 그렇게 버려지는 (세상에 이용되지 않는) 지식들을 흡수하게 되고 결국 자기 안에 그 생각들을 응축해 놓는다.
통제된 사회와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상. 한탸의 겉과 속은 이렇게 서로 성질이 다른 사상들이 공존하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는 예수와도 만나고 부처와도 친구를 맺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미 그의 머릿 속은 그러한 지식들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탓이다. 책을 읽다 보면 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삼십오 년째 수리터들이 맥주를 마셔온 것도 사실이다. 마시려고 마시는 게 아니라 (난 술꾼이라면 질색하니까) 사고의 흐름을 돕고 텍스트의 심부까지 더 잘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1장-
그가 말하길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사고의 흐름을 돕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살펴보면 술을 마시지 않으면 머리 속이 너무 시끄러워 견딜 수 없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 앞서 말한 ‘나는 삼십오 년 동안 폐지 더미에서 일한다’처럼 반복되는 말이 있다. 바로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표현이다.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5번 이상은 나왔던 표현이다. 보흐발 흐라발은 왜 이 같은 문장을 반복하여 작성하였을까? 앞서 말한 ‘삼십오 년 동안 폐지 더미에서 일한다’의 표현과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표현은 둘 다 암울한 현재를 표현한 듯하다. 하지만 전자의 표현은 자기를 중심으로 나타낸 표현이고, 후자의 표현은 자신 이외에 타자를 바라보면서 알게 되는 현재의 인식이 아니었을까?
한탸가 소설 속에서 봐왔던 진실은 언제나 파괴되고 억눌리고 빼앗기고 짓눌린다. 그와 같이 살고 있는 생쥐들을 보면 더더욱 현재의 인간들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생쥐들은 자기들의 밥그릇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운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변화(갑자기 책이 무너진다거나 하는)에 영락없이 죽어 버린다. 혹은 책 속에 숨어 있다가 한탸가 압축기 속으로 던져 버리는 책과 함께 기계 속에서 운명을 다한다. 여기서 책은 세상이고, 쥐는 사람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도 환경이 바뀌면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생쥐들을 통해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아직 하늘은 인간적이지 못한 게 맞다.
한탸가 생각해온, 그리고 저자가 생각해온 인간적인 하늘은 과연 어떤 장면이었을까? 소설을 읽다 보면 한탸는 크게 두 번의 이별을 하게 된다. 한 명은 만타라는 이름의 여성인데, 얼굴도 예쁘고 스타일도 좋았던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녀의 결말은 언제나 똥과 함께 끝난다. 정말 그런 똥을 쌌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어쩌면 저자인 보흐발 흐라발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만타는 앞서 말했다시피 겉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지식이라든지 교양이라든지 부족한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책을 많이 읽으며, (비록 폐지 더미에서 일을 하지만) 많은 지식을 쌓고 있는 한탸와는 반대되는 인물이다. 저자는 이 둘을 같이 놔두면서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나는 압축기 옆에서 일하지만 생각은 만차에게 가 있다.
-3장-
한탸가 이별하는 또 한 명의 여인은 이름 모를 집시다. 그녀는 어느 순간 한탸의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한탸의 곁을 지키며 그를 보필한다. 둘은 크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서로 의지하게 된다. 저자가 생각해온 인간적인 하늘은 이게 아닐까? 하지만 곧 이런 인간적인 한탸의 삶도 다시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만 말이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두 가지 문장만 생각나길 바랐다. ‘나는 삼십오 년간 폐지 더미에서 일했다.’와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이 두 문장은 저자가 이 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이고 목적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특히 후자의 문장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남아있다. 아마 나에게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이 문장 하나로 기억될 듯하다. 현실의 삶이 너무나 팍팍했던 저자와 그래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 자꾸만 소설 속 한탸와 오버랩되어 보이는 이유는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