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18 대림미술관-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
대림 미술관의 일요일 아침은 한산했다. 보통은 부쩍부쩍 거리기 일쑤지만 오늘은 예외다. 4일의 짧은 설 연휴의 끄트머리. 다른 사람들은 이제야 고향에서 출발하겠지만 나는 어제 하루 동안 6시간의 버스를 타고 일찍 올라왔다.
고양이 밥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지만 요즘 들어 고향집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예매에 실패했다는 핑계 같은 이유로 하루 일찍 집을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마지막 휴일을 미술관에 왔다.
이번 전시는 paper present. 종이를 이용한 전시다. 처음 홍보물을 봤을 때는 오묘한 신비감에 매료되었다.
Paper present 이전 전시는 토드 샐비의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주제의 전시였는데, 뭔가 톡톡 뛰는 크리에이티적 상상력에 반했었다. 그에 비해 이번 전시는 보다 아티스트적 감성이 더 느껴지는 전시였다.
대림 미술관의 구조를 보면 첫 전시관은 2층에 위치해 있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검은 배경에 춤을 추듯 유려한 쉐입의 종이였다. 그리고 출입구 바로 앞에는 짧은 시가 쓰여 있었다.
고요한 새벽의 별 빛
너의 하늘로 내려가 깜깜한 너의 별에
옅은 빛이라도 보내어 주고 싶어서.
춤을 추듯 꾸여 있는 모습이 연기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처럼 보였다. 2층에는 이 작품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도 들어서 있었다.
이 작품들은 단순히 종이를 접는 것만으로 다양한 형태를 연출해 놓았다. 신기한 것은 마지막 이미지의 경우에는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새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꽃봉오리 같기도 한 착각을 주었다. 마치 어떤 작품을 두고 비치는 빛의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의 그림자가 생기게 만든 작품처럼.
새하얀 종이 작품을 지나 두 번째 통로로 이동하면 거대한 작품 두 개가 눈 앞에서 보게 된다. 하나는 거대한 바퀴처럼 생겼고, 또 다른 한 작품은 마치 병풍처럼 세워져 있다.
이 두 작품은 앞선 검은 방에서 봤던 작품과는 제작 방법이 다르다. 이 작품은 거대한 종이를 잘라내어 그 속에 형태를 만들었다. 이전 방의 작품은 종이를 자르지 않고 하나하나 접어서 만들었다. 서로 제작 방식이 다르지만 그 웅장함과 신비함이 주는 아름다움은 똑같았다.
이 작품 역시 빛에 비치는 그림자를 살펴보았는데 또 다른 느낌이다. 예쁜 부챗살의 느낌 같기도 하고 동양적 회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섬세한 손길이
만드는 햇살
그대에게 사랑으로 드리우고 싶습니다.
조심스럽게 얹혀진 그림자 옆에서
빛은 황홀을 머금고 발하는 법이니까요.
이번 작품에도 역시 바닥에는 시가 하나 짧게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종이의 아름다움과 시의 감미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전시라 했다. 저렇게 짧지만 글귀를 보고 작품을 보니 작품 하나하나가 시의 한 문구처럼 다가왔다.
멈춰진 시간을
깨우는 바람
따스한 바람이 부는 곳에 꽃이 피어나듯,
네 손길이 닿은 곳에 사랑이 피어나길.
세 번째 작품도 시와 함께 시작했다. 이번 시는 빛보다는 움직이나 한들 거림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 작품 역시 시와 어울리기 멋진 정원의 모습을 띤다.
이 곳은 일본의 유명 정원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 공간을 걸으면서 종이가 가진 순백의 아름다움과 차분해지는 기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게 메리트였다. 이 공간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닥에 설치된 조명이다.
마치 거울로 된 물웅덩이처럼 이 곳을 바라보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종이 이파리들이 보인다. 마치 물에 비친 나뭇잎을 보듯이 거울과 불빛은 그렇게 정원의 아침을 잘 묘사하고 있다.
3층으로 올라오면 2층과는 또 다른 느낌의 종이 예술이 펼쳐져 있다. 우선 3층 입구에는 역시 시가 적혀 있다.
익숙한 풍경에
숨은 놀라움
그 많은 것들 중 너는 왜 하필 꽃이어서,
걷던 나를 멈추게 해 너만 바라보게 만들어.
그 많은 꽃들 중 그게 왜 하필 너여서,
그 자리에 주저 아 너만 쓰다듬게 만들어.
이번 시는 눈길을 사로잡는 것에 대한 시였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고 그냥 넘어가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 3층의 전시 작품들의 주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3층의 첫 번째 작품은 일상 속 소품이다. 그릇부터 식탁, 테이블, 장롱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이 곳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 종이로 만든 것이다. 약한 재질의 대명사인 종이로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 아래에 첫 번째 보여줬던 그릇 작품이다. 작품명은 airvase. 일명 공기를 담는 그릇이다. 종이를 아주 얇게 자른 다음 이를 덧붙여 놓은 작품인데, 이것을 얼마나 펼치냐에 따라 그릇의 모양이나 용량이 달라진다. 특히 나는 해당 작품을 옆에서 바라보았는데, 조명에 비쳐 그늘진 모습이 다른 차원의 이미지를 멱에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3층의 두 번째 작품은 종이를 이용한 상상력 공장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왔던 전화기. 디스켓 등의 아이템들을 종이로 만든 거다. 특히 여러 색종이를 사용했는지 컬러풀한 생감과 가공할만한 디테일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특히 이 구역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은 거대한 공장 같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앞서 보았던 이미지들과 또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다. 사실 그 전 작품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봤던 아날로그적 아이템들을 종이로 옮겨 놓은 거다. 그에 비해 아래의 작품은 우리가 기존에 본 적이 없는 작품이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아날로그와 기계적 테크의 조합을 아티스트의 상상력으로 재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우리는 디지털 혹은 테크적인 기술 발전을 향하지만 가끔씩 과거의 아날로그를 추억한다. 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없지만 이 둘은 서로 상극이지만 서로에게 있어 꼭 필요한 개념이다.
아티스트는 그 두 가지 개념을 하나의 기계에 섞어버리면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뭔가를 작품으로 구현해 내 버린 것이다.
거리에서 만난 동화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는 간혹,
단어들이 몇 가락 피어나곤 했다.
그러던 나는 그 가락들을 모아
문장을 한 자락 꿰어냈다.
'거리에서 만난 동화'라는 시로 시작하는 이번 작품은 정말 상상력을 자극하는 놀라움을 선사했다. 마치 명품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섬세한 디테일로 종이로 만든 게 맞는지 의심이 가는 퀄리티가 있었다.
종이로 생명을 만들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컬러풀하지만 질감과 움직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정말 명품의 우아함이 넘치는 작품들을 보면서 다음 작품으로 발길을 떼기가 힘들었다.
특히 여우로 만들어진 액자 컬렉션은 소장하고 싶을 정도의 귀여움이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한 겨울 눈밭을 뛰어다니는 붉은여우가 그려졌다.
꽃잎에 스며든 설렘
꽃에 흔들리는 여린 줄기가 아닌
단단한 밑동으로 꽃을 보듬어 주는
나는,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대놓고 자신이 나무였다고 주장하는 시 주위로 정말 종이로 만든 나무가 예쁘게 드리워 있었다. 마치 버들나무처럼 늘어진 종이 가지들을 보면서 녹음이 우거진 숲 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시 공간으 층고가 높아서 더욱 높고 웅장하게 느껴졌다. 2층에서 봤던 정원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멋짐이었다.
3층의 마지막은 은은한 붉은빛으로 시작했다. '그곳에 물든 기억'이라는 시는 이곳의 테마가 그리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에 물든 기억
너에게 그때의 색은 만개한 분홍일까,
가로변으로 밀려난 낙화의 갈빛일까.
오늘도 내 기억의 시야는
속절없는 분홍으로 피었다.
추억 속 시야를 다시 끄집어내듯 마지막 전시는 감성 그 자체였다. 붉은 조명에 하늘 거리는 갈대를 연상케 하는 종이 아트는 어느덧 여름을 지나 가을의 한 언저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아무 기대도 없이 갔었던 전시였다. 종이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사소한 생각은 우리 범인들만 했던 것 같다. 아티스트들에게 종이는 더할 나위 없는 예술의 소재였던 거다. 이번 전시를 보면서 종이가 가진 아름다음에 반하고 말았다. 2층에서는 순백의 그 순결함과 고귀함에. 3층에서는 컬러풀하고 고급스러운 그 우아함에 반했던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