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 홍성수
칼은 글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sns가 발달된 요즘에는 '글'을 '말'로 바꾸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매일 말을 하지만,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내가 우연히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칼이 되고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대수롭지 않게 어떤 말이든 던질 수 있을까?
이 책은 말이 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우리가 흔히 혐오표현이라 말하는 것들. 동성애, 여혐, 지역주의, 종교, 나라 등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과 다른 요소들을 분리한다. 그냥 분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다른 영역의 것들을 폄하하고 지적하며 공격한다. 마치 그래야만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 나도 모르게 노란 코끼리를 생각했을 거다. 말이란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문맥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바로 뇌로 직적 연결하여 이미지 처리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그들은 존중한다.' 이 말 자체도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이미 해당 단어로 존재들을 규정한 뒤 반대를 해버리면 뒤따라오는 말이 어떤 좋은 표현이더라도 그것들은 흐릿해져버리고 만다. 결국 남는 것은 처음 입 밖으로 나갔던 몇 개의 단어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감정의 흔적들뿐이다.
“너무 민감하게 구는 게 아냐?” 하며 생각할 수도 있다. 민감하게 구는 게 맞다. 이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내용이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조선인들은 바퀴벌레 같아서 모두 몰아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일본 도쿄의 시내에서 말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똑같은 말이라고 해도 그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사회적 약자이며, 소수라면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 여론이라는 건 우습게도 처음에는 잘 반응하지 않는다. 침묵의 나선 효과라고 한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소수의 의견은 자연스럽게 묻혀버린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 침묵도 몇몇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두 명이 세 명이나 네 명이 될 경우 순식간에 사회 전체로 퍼지게 된다. 밴드웨건 이론으로도 이는 설명이 가능하다. 길을 가다가 한 명이 먼 곳을 바라봐도 똑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지만, 3명 이상이 바라보게 되면 아무 상관없는 사람도 똑같은 곳을 보게 된다. 이는 집단 지성이 움직이는 것이며 곧 여론의 형성이다. 사람마다 반응하는 최소 인원의 역치가 다르지만 일단 반응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망각하게 된다. 결국 집단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생각하게 되는 꼭두각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수의 이야기는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더 확산력이 좋다.
가만히 살펴보면 혐오표현은 지극히 정치적 단어다. 정치는 언제나 선거와 연관이 있고, 선거는 찍든가 아니든가 하는 양자택일이 분명히 따라온다. 결국 혐오표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넌 나와 달라 그래서 넌 틀렸어.'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넌 여자라서 나와 다르고, 넌 동성애라서 나랑 다르고, 넌 피부색이 나와 다르고 등. 이런 구분 짓기는 결국 하나가 없어져야만 하는 치킨게임이 불가피하다.
산을 볼 때 나무와 바위만 보는 사람은 결국 어느 산을 가든 똑같은 풍경만 볼 수밖에 없다. 미시적 관점의 한계다. 진짜 산을 보려면 산 전체를 봐야 한다.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있는 골짜기와 구릉의 줄기를 함께 바라봐야만 이 산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 사회 집단도 똑같다. 집단을 자꾸만 구분 짓다 보면 끝이 없어진다. 사회는 지반의 모임이 아니라 집단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구분 짓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저자는 이를 대체표현이라 말한다.
대체표현은 해당 집단의 차이점을 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표현이다. 서로의 다름을 주목하기보다 같음을 찾아가는 말은 칼이 아닌 연고가 되고 붕대가 된다. 연고와 붕대의 성질이 그렇듯 서로 찢어진 곳을 붙여주고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존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서로 다름보다는 같음을 찾을 수 있는 표현을 찾고자 노력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는 언제나 그에 따른 근거가 따라와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 현재 사회가 가지는 위험성을 막 파헤친 다음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덮어버린 느낌이 크다. 물론 대부분의 이런 류의 책이 문제제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무작정 대체표현을 쓰도록 하는 것을 너무 생뚱맞게 제시했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책에서도 말했다시피 혐오표현의 문제는 증오범죄의 가능성 때문이다. 단순한 혐오는 그냥 개인의 취향이라고 넘어갈 수고 있다. 책에서도 혐오표현의 사용이 표현의 자유 개념과 서로 대치하지 않을까 하는 점을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하며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혐오표현에서 증오범죄,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로 넘어가는 단계를 밟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전체적 책의 흐름을 봤을 때도 너무 용두사미의 결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버리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