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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Nov 17. 2023

대형교회 사임, 상가교회 부임

[상가교회 분투기 0] 개척교회는 아니지만, 교회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상가교회 분투기 0]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상가교회로 가는 이유 

    



  9년 동안 대형교회에서 청년부와 교구를 사역하다, 주님의 뜻하심과 나의 소망이 만나 상가(개척)교회 담임으로 부임하게 된 2023년 연말, 지금부터 시작될 처절할 수도, 낭만적일 수도 있을 상가교회 분투기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사실상 개척교회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직면해야 할 고단한 현실과 헤쳐나가야 할 희망찬 내일의 공존 속에, 하나님은 어떻게 무명의 상가교회를 인도해 가실까?


  17년 전, 대책 없이 젊음과 열정만으로 북극으로 떠났던 그 겨울밤, 주님의 은총 가득한 부르심이 있었듯, 다시 목회의 길 위에서 옅은 떨림을 가지고 광야로 나아가 본다. 좁은 길 가라고 설교만 하는 목사보다 먼저 좁은 길로 가보고, 이곳에도 분명 은혜와 소망이 있다고, 그러니 한번 와보라고, 와서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공동체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달뜨게 손짓하는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면서? 그래, 그래서 나는 상가교회로 간다.      



 

  “목사님, 실은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몇 해 전 소천하셨습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이 한 마디가 운명을 바꿀 줄은 몰랐다. 9년 동안 매진했던 대형교회 부목사 자리를 사임하고, 상가(규모 면에서는 개척)교회 담임으로 간 이유를 나열하자면 몇 가지가 있겠지만, ‘죽음’이라는 키워드만큼 삶의 지축을 흔드는 호소력 있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6년이 넘는 담임목사의 암투병기간 동안 성도들은 물심양면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했고, 점차 회복되어가던 목사님의 급작스러운 소천 후에는 하필 코로나 팬데믹이 엄습했다. 목자 잃은 양이 되어 슬픔을 채 가누기도 전에, 전 세계적 전염병 난리로 모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교회 공동체는 점차 쇠락해졌다. 한때 복작복작 지내며 영적 공동체를 이뤘던 교세는 급격히 줄어, 지금은 10명대가 모여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분투하고 있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가를 임차해 월세를 내는 교회 형편상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유무형의 복지를 고려하면 꽤 적지 않은 수입 감소를 감수해야 했다. 더욱이 얼마 전 늦둥이 아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신생아 가정으로서, 한창 경제활동에 박차를 가해야 할 마흔 중반의 목회자로서 마냥 이상만 쫓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질문에는 ‘나는 어떻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나는 왜 목회자가 되었는가’란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      


  내 삶의 결을 보건대, 목회자로서의 숭고한 어떤 목회철학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나 역시 누구보다 자기중심성이 강한, 욕망 가득한 죄인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께서 내 모습을 이렇게 빚으셨고,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기질을 주셨다. 현실 파악을 못하면서 동시에 누구보다 현실에 잘 적응하는 게 7년 간의 세계일주를 통해 내게 주신 은혜가 아니었던가. 처음 교회를 방문했을 때 좁고, 춥고, 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만 명 넘는 교회에서 사역하다 상가교회로 오니 규모와 시설에 대한 역체감이 더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부재한 것의 불편함보다는 채워갈 것의 희망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되새겨보면 이 교회로 오기로 한, 주님께서 마음을 주신 몇 가지 장면들이 있다. 하나는 장로님의 성품이다. 청빙 절차가 진행될 때부터 지금까지 장로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적잖이 마음에 감동이 일었다. 겸손하고 온유한 성정으로 목회자를 품어 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그득할뿐더러, 교회의 미래에 대해 함께 상의할 때, 귀 기울여주고 또 정중히 의견을 제안하면서 함께 마음을 맞춰가는 것이 내게는 평안한 기쁨으로 다가왔다. 


  성도님들은 또 어떤가? 담임목사의 부재에도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위해 눈물 어린 시간들을 보내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명망 있고, 스펙 좋은 목회자가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날까지 오랫동안 곁에 함께 있어 주고, 진실하게 예배드리며, 주님의 나라를 꿈꾸며 같은 호흡으로 걷는 목회자일 것이다. 소천하신 목사님에게 양육 훈련받고, 그 믿음 변치 않으며 지금껏 주님만 바라보며 자리를 지킨 이분들이라면 오히려 내게 귀한 축복이리라. 내가 복이 있는 목회자이리라!


  아직 정식 부임 전이지만 몇 차례 교회를 방문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소망이 차올랐고,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거란 분명한 확신이 든다. ‘조직상’ 개척교회는 아니지만, ‘현실상’ 교회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온 발걸음을 주님이 마냥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 믿는다. 부흥이나 성장에 대한 욕망이 왜 없겠냐만은 그건 전적인 주님의 일이니 나는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려고 한다. 그간 멈춰있었던 예배를 다시 세우고,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를 향해 소망으로 나아가려 한다.      


  무엇보다 진리와 은혜 가운데 서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과 친밀해지며, 그 열매가 이웃사랑으로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제 상가교회로 간다. 가면 사발면과 김밥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박한 기쁨으로 함께하기를 원하는 이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작은교회 #상가교회 #개척교회 #청년교회 #목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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