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에 대한 믿음(Credere in Deum)

‘세상의 마지막 밤’

by 시크seek

[M_Book #6] ‘세상의 마지막 밤’ by C. S. 루이스


* 크리스천 독서모임으로 C. S. 루이스의 '세상의 마지막 밤'(홍성사)을 진행했고, 독서모임 내용을 나누기 전에 먼저 그중 한 멤버의 서평을 올린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서평: 조명연_오륜교회)


SE-b471372c-6387-42fc-af8f-acceec810bdc.png

2020 크리스천 독서모임: <세상의 마지막 밤> by C. S. 루이스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신앙'에 대해서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각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느낌의 책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나도 각 항목에 맞추어 독후감을 써볼까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들었던 생각들을 쓰다 보니 뭔가 독후감이라기보다는 세상의 마지막 밤 설명서와 같은 느낌의 글이 되어버렸다. 나는 재밌었지만... 읽는 사람들도 재밌...길 바랍니다.


(1) 기도의 효력


사실 이 장의 제목은 기도의 '효력'이라는 아주 작은 파트에 묶일 것이 아니었다. 기도의 '정의'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았을 정도의 이야기를 '효력'이라는 작은 프레임으로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도는 신과의 대화이다.'라는 요즈음의 표현이 그 당시에는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남들이 다 사용하는 표현을 안 쓰고 싶었던 것일까? 대화와 요청, 그리고 주문/주술 (呪文 / 呪術 Witchcraft, 혹은 Spell)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노력하고 있다.


주문은 일종의 초자연적 규칙과 법칙으로, 마술(魔術, magic)과는 다른 일이다. 예전에는 마술과 마법은 비슷한 부류로 묶였던 적도 있으나 마술이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으로 빠지면서 마술은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로, 그리고 마법은 법칙이 있는 것을 사용하는 분야가 되었다. 그러나 마법이나 마법 행위를 일으켜 소원을 비는 행위인 주문은 일정한 법칙과 규칙이 있다. 또한 그 법칙과 규칙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 역시 시전자의 능력과 내공이 쌓일수록 강력하거나 더 세밀한 부분을 더욱더 세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엄밀히 말하여 요청은 대화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해석하는 학파에 따라 대화가 요청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는 있겠으나), 대화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굳이 학문적일 필요가 없다. 물론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대화에는 화자와 청자가 있으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 등을 주고받는 인간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행위 중 하나". 일상생활에서 자주 하는 행위이기에 대화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좋은' 대화 방식을 아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언제나 요청만 하는 대화는 재미가 없을뿐더러 건강한 대화도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자아를 키우는 행위를 매일같이 하고 있지 않던가?


저자가 이야기하는 기도는 대화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기에 그의 글을 대화로 해석해보면 이해가 더욱더 쉽다. 만약 기도가 주문이었다고 한다면 근대 사회에서부터 중요하게 여겨왔던 '과학'이라는 학문으로 풀기가 더욱더 쉬웠을 것이다.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 과학(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을지라도 같은 재료와 같은 방법으로 여러 번 하면 그 나타나는 현상은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대화이다.


일반적인 대화와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에 화'자'와 청'자'가 있고, '대화의 주제'가 있으며 감정과 생각에 대한 '소통'이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아는 성장하게 된다. (물론 화, 청자의 '자(者)'와 자아의 '자(自)'는 다른 한자이다.)


기도의 화자와 청자는 결국 인간과 신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대화와 달리 어쩌면 일방적인 대화가 오고 가게 되어있다. '신'이라는 '절대 선' 혹은 '절대 기준'이 있고 인간이라는 변칙적인 존재가 있다.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는 마치 적은 것을 아는 아이와 많은 것을 아는 어른과 같은, 아니 그것보다 훨씬 심한 수준 차이가 오고 가게 되어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리는 절대자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우리는 깨달을 뿐이다. 그 절대자를 지식으로 설득하거나 가르칠 수 없으며, 요청의 기준 역시 그가 보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 요청을 수락하거나 변경하거나 거절할 것이다.


내가 청자일 때의 문제는 아주 크다. 우리는 그의 소리를 듣기 힘들다. 아니 심지어 많은 종교는 그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리'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 따른 답변은 어떤 것일지, 그리고 그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잡기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제가 발생해왔다. 절대자의 이야기를 일반적으로 대화하는 방식으로는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준과 그의 지식과 그의 지혜는 절대적이다. 그렇게 특수한 사람들이 그 절대자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하였고 그 주장은 절대적이기에 모든 이들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겨를 없이 따라갔어야만 했다.


하지만 기도는 대화이다. 이 기도가 대화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와 대화하는가


우선 그 기도라는 행위를 같이 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라지쿠마르 히라니 감독, 아미르 칸 주연의 인도 영화 <P.K>를 보면 그것은 아주 뚜렷해진다. 수많은 종교는 절대적 아버지가 되시는 자신의 종교의 절대자에게 기도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너의 아내가 고쳐지기 위해 여기서 500KM 떨어진 곳의 아주 영험한 누군가에게 가서 기도를 받고, 거기에 있는 물로 7번 씻어라"와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만약 그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많은 종교의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P.K(아미르 칸 역)는 이야기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만든 인간인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요청을 했을 때도 똑같이 대답하시렵니까?"


여기서 정리될 1번, 당신의 절대자는 과연 어떤 존재이며 나와는 어떤 관계인가? 그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적인 존재 '야훼'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다. 사랑하다 못해 자신이 직접 내려와 우리를 대신해 죽을 정도의 존재이다. 그 존재와 우리가 대화하고 있다. 당신의 육적인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인자하시고 자비가 넘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지식과 지혜와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된다. 때로는 우리가 육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기준에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마저 그분의 기준에서는 더 좋은 것이 있거나 선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는 과연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가?


자아의 성장


두 번째는 그 대화를 통해 내가 얻게 되는 '자아의 성장'이다. 만약 그 존재가 육체적인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 나의 자아는 결코 나 혼자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대화와 경험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구축하게 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자아의 성장"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성령의 9가지 열매"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내면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라디아서 5:22~23). 이 열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다. (지금도 긴데 더 길어질 것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결국 행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웃을 내 몸으로 여기며 내가 얻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실천하고 제자화하는 것. 그것이 절대자와의 소통을 통해 얻게 되는 자아의 성장이고 그를 통해 나타나는 여러 효과일 것이다.


진정한 자유


세 번째는 그 대화를 통해서 얻게 될 자유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지옥에 갈 뻔했던 나를 천국으로 옮겨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 우주 만물의 창조 때 이상의 회복이며,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외모 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진화론, 창조론, 신학, 과학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묶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이었던 우리는 완벽하게 절대자와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분과 대화함으로써 그분의 지식과 지혜와 사랑을 얻으며 예수의 자리까지 성장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마치 신선처럼 현세에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여 문제가 있으나 없으나, 돈이 있으나 없으나, 내 상황이 좋거나 좋지 않거나 상관없이 살 수 있게 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결론


우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이며 나머지 것들은 덤으로 주시는 것이다. 없어도 되는 것을 주님의 은혜로 더해주시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결국 그렇다. 기도의 효력은 우리가 우리의 유일신 야훼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구하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을 그의 결정 하에 더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30~32)


기도를 통해 주문과 주술을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효력이다.


(2) 믿음의 고집에 대하여


이 장에서는 믿음이 왜 고집스러워 보이는지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근대로부터 이어진 '과학적 사고'와 '믿음'의 분야를 나눠서 봐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나는 믿음과 지식은 분명히 다른 영역임을 왜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신앙 안에서 믿음이라는 영역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신앙 안에서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적 사고의 영역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넓어지면서 각자의 영역을 나누다가 다시 합쳐지고 있다. 과학을 예로 들면 철학과 함께 시작하였던 모든 영역은 물리, 화학, 생물학으로 넓어지고 나누어졌다가 다시 '물리화학', '생화학'과 같이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 인문학의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인지과학', '고고학', '심리학' 등으로 그 분야를 넓히고 있다.


결국 지식의 갈라짐으로 첫 시작은 사실 매우 달라 보였으나 끝은 같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그에 따라 철학과 과학은 종교를 이해하려는 시도하였고, 신을 죽이는 자리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인 C.S 루이스가 신을 죽인 과학의 시도 자체가 아주 잘못된 시도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한 뒤 그 실험을 통해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언제나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곤 한다. 변증하며 살아왔던 나의 삶에서 언제나 믿음은 설명 가능한 것이었다. 증거가 충분했으며 경험이 충분했던 일이었다. 물론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녔다. 하지만 내가 설명했던 신앙/믿음은 아래 3개와 같았다.


첫째, 올바른 측정법을 사용해야 한다.


길이는 길이의 단위로, 무게는 무게의 단위로, 힘은 힘의 단위로 측정하듯이 영혼은 영혼으로 측정해야 다는 것이었다. 무게를 자로 측정하지 않는 것처럼, 길이를 저울로 측정하지 않는 것처럼, 영혼을 육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유물론적인 시각으로는 절대로 영혼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저차원의 과학은 고차원의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유명한 예화가 되었다. 1차원의 점과 선은 2차원의 평면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2차원의 평면은 3차원의 공간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3차원에 사는 우리는 4차원 5차원으로 가는 과학을 이해하기 힘들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보다 조금의 차원이 높아진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그 차원 자체를 만든 절대자와 그의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겠냐는 문제이다.


셋째,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예수님으로 모든 지식은 모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던 지식이 융합되고 통합되고 있다. 태초를 생각해보자. 모든 지식들이 아담에게 탑재되었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결국 인간의 죄로 인해 온 세상이 망가지기 전부터 시작했던 '지식'은 사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도 뉴턴과 그의 동료들을 생각해보면 더욱더 쉬운 일이다. 비록 근대를 지나며 '신본주의'를 버린 여러 과학과 철학, 사고 구조들이 나왔지만, 요즘 현대 과학을 보면 다시 점점 자기의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진리'라는 것은 어떠한 각도에서 보든 맞는 말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수학, 과학, 역사 그 어떠한 지식으로 살펴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온 세상을 만드셨으며', '우리의 죄로 인해 죽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셨다가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셔서 올라가셨으며', '곧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사야 11: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9~12)


그렇다 이제 마지막 때에 아주 가까워졌기에 모든 지식은 예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고 항상 설명하며 변증하여 전도하던 나에게 저자는 완벽하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었다. 믿음과 지식은 다른 것이지만,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식과 믿음은 다른 것이다. 그 쉬운 개념을 메꾸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설명을 붙였던 것인가? 물론 이 에세이는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인 에세이다 보니 믿음의 고집에 대해서 집요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저자가 잠시 피해갔던 '지식'의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7~80년대 덮어놓고 믿으라던 그 방식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지금 얼마나 무너졌는지 알 수도 없다. 수많은 기적과 은혜들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국교회의 몸 덩이만을 키우는데 급급했을 뿐 제대로 된 제자를 만들지 못했다.


한국 복음주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김용의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이 없어서 광야에서 죽었던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복음은 복음이 되지 않았고 메시아는 메시아가 되지 않았기에 죽은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과 수많은 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인들에게 복음보다는 재물이었고, 메시아보다는 권력이었다. 그렇게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종교의 신들과 동일한 일반 종교적 절대자를 만나, 관계 회복이 완전히 되지 못한 채, 기도가 아닌 주문을 배웠다. 그렇기에 그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기도가 아닌 주문을, 야훼가 아닌 신을 알려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 만인이 제사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사장은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단과 사이비는 여기저기서 판을 치고 있고 우리는 그들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다. 결국, 이 모든 원인은 앎이 부족해서였다. 기독교는 생각보다 앎이 중요한 종교이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여호수아 4:6~7)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모든 지식과 지혜와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적을 보아온 기복 신앙적 한국 기독교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제대로 없었다.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결국 이단이 나와도 구분할 수가 없고, 사이비가 나와도 무조건 쫓아다니는 세대가 된 것이다.


결론 - 그럼에도 믿음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매우 다른 것이다. 결국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자신이 죄인으로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를 '믿는다'라는 행위에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믿음은 신앙의 기초가 된다. 믿음 없이는 지식도 없다.


(3) 썩은 백합


이 장에서는 '가식'과 '빈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앞의 다른 에세이들과 다르게 저자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교양적인 사람인지 과시적으로 보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양의 기준이나 수준을 함부로 정할 수는 없다. 또는 교양의 공통적인 범위를 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가 한 고전을 읽었고 다른 이는 다른 고전을 읽었다고 해서 둘의 교양의 수준이 다르거나 한 사람은 교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교양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책이나 음악과 같은 지식적 채움뿐 아니라 일종의 교류이고 생활 습관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카테고리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는 행위가 제일 무식하고 '교양 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자신이 얼마나 교양 있는 사람이고 수많은 작품을 읽고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저자는 지금 의도적으로 우리가 정의하기 어려운 단어들을 읊으며 그 단어들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 단어들의 본질은 형식을 통해 가두거나 설명하기 위한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형질을 잃게 되어 있다. (마치 양자역학 같....)


또한 그렇게 표현된 단어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목표를 잡고 설정하고 달려가는 순간 인간의 특성상 잘해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대부분의 경우는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본질과 가깝지 못한 형식을 목표 삼고 달려가봤자 그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썩은 백합의 역할은 분명히 있다. 썩은 백합이 조화(造花) 보다 나은 이유는 살아있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언제나 형식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이 형식을 만든다. 가식이든 껍질밖에 남지 않은 빈 목표이든 비록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을 꾸준히 하고 내 몸에 체화시킨다는 것은 정말 큰 자산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행동들에 본질이 있는가이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한 분야 한 분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다. 이마저도 관계이기 때문에 결국 '자아',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에 결국 사람에게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한테도 못하고, 나 자신에게도 못한다.


경건 생활, 신학적 지식, 불같은 믿음, 그리고 더 많은 것들로 기독교가 채워져 있겠지만 결국 그것들로 나누거나 세부적인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왜곡되고 실패한다. 또한 그 설명할 수 없는 하나하나의 개념들이 머리에 들어오고 정립될수록 단순하게 하나의 개념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 자체가 바뀌게 된다. 그렇다. 기독교는 종교 활동이 아니라 삶이다.


(4) 스크루테이프, 축배를 제안하다


사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조금 힘들었을 설정이다. 또한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인지라 이념에 대한 생각까지 들어가 있는 것을 확 느낄 수 있던 장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사단이 운영하는 것이고, 나치와 공산주의 역시 그러했다. 되려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좋은 움직임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의 반기독교적 요소는 사라졌고,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위험한 현상이 횡행했습니다.」 <홍성사 74P>

「그 귀중한 사람 루소가 그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냈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그의 완전한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종교만 허용되고, 노예제가 회복되며, 개인은 (본인은 몰랐지만) 정부의 모든 지시가 바로 그가 진정 원하던 바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헤겔(우리 쪽에 없어선 안 될 또 다른 선전원)을 거쳐 쉽사리 나치와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국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자기 소유의 나무를 자기 도끼로 베고 자기 톱으로 널빤지를 만들어 자기 정원에 공구창고 하나 만드는 일도 허가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홍성사 75p>

「여러분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로 인간들의 코를 꿰어 맘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홍성사 76p>


물론 이 이야기가 완벽하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살짝 반대하는 의견을 내어 본다. 사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기준으로 옳고 그름이 갈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어떤 정치도 전략도 감정도 나쁜 것은 없다. 단지 그것들을 나쁘게 만들어 가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 2차 대전이 펼쳐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가 오면서 인류는 기존까지 믿고 있던 모든 개념과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최악의 철학 사상인 회의주의를 모든 개념의 근본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모든 기존 규칙이 없지만, 이 사회는 굴려야 하기에 개인이 그 기준을 판단하게 했다. 가장 불완전한 존재에게 가장 완벽해야 하는 것을 맡긴 셈이다. 그 모든 상황이 지나며 지금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폐해를 고스란히 맛보고 있다. 내가 좋으면 사람을 죽여도, 강간해도 괜찮은 세상에서 인간은 무언가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인간은 드디어 인간 본연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인간은 모두가 다 다르며 서로 간에 옳다고 여기는 것들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드디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이념이나 -izm들이 아녔다. 문제는 인간이었다. 이기심 가득한 인간은 아무리 좋은 계획과 이념, 그리고 생각들을 가져다줘도 악하게 만들어 버렸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아주 극적인 '자본주의'와 아주 극적인 '사회주의'의 두 세상이 아주 잘 녹아 있다. 그 두 세계가 극적으로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는 그 세계는 절대적으로 인간이 원하는 이상향이 아니었음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참 씁쓸하게도 지금 우리의 사회는 멋진 신세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A.I는 거의 완성 단계에 있고, 그 A.I들은 이 사회의 δ, ε 계급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죽여버린 신의 것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완벽히 새로운 인간만의 기준을 세울 것이고, 그 기준은 A.I가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노동을 마무리하고, 최소의 노동,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멋진 신세계는 과연 행복할 것인가? 과연 완벽한 선만 존재하는 곳일까?


근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종교철학가인 블레즈 파스칼은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이 있다."라고 말한다.


지금껏 인간이 생각했던 모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왔지만 되려 인간에게 더욱 큰 고통을 줄 뿐이었다. 또한 여러 시스템과 많은 주의,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인간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고 해보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멈추어줄 유일한 존재는 우리 주님 밖에는 없으시다. 각 사람 안에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그 공간이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의 신분이 완벽히 회복되어 우리가 이 세상의 것과 상관없이 살아나갈 때,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이념과 수많은 시스템, 사고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변화시키려고 하겠지만 그것은 절대로 우리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없다. 오로지 주님. 주님뿐이다.


(5) 선한 일과 선행


이 장에서 저자는 본인의 업무에 충실한 것, 좋은 것을 만드는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 업무의 충실해야 함의 깊이나 색깔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상황들을 이용하여 설명했다. (사냥꾼, 대장장이, 직업적 매춘, 광고, 예술가 등) 하지만 과연 당장의 내 눈앞에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해서 최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인 것일까? 이 이야기는 보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정확히 맞는 이야기다. 이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보수의 입장에서 말이다.


물론 체제를 무너트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수와 진보 양측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이유는 양측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저자가 앞 장에서도 이야기했던 '기독교 사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사단이 생각하기에 아주 위험할 생각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언제나 가장 물질적 번영을 누리면서도 가장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였다. 모든 선지자를 다 볼 수는 없으니 아모스 선지자를 예로 들어보자.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하여 전쟁의 전리품으로 적잖은 부를 축적했고, 교역로를 지나는 다른 나라의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거두어 국고를 늘려갔으며, 활발한 상행위를 통해 부유해져 갔다. (아모스 8:5-6), 당시 특권층들은 겨울 궁, 여름 궁, 상아로 장식한 침상을 사용하는 등 (아모스 3:15, 6:4) 풍요롭다 못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풍성한 희생 제물로 제사 지냈으나 (아모스 4:4~5, 5:21~22) 점차 빈부의 격차가 심해져서 지배계층은 사치 속에 있지만 (아모스 3:15, 5:11), 빈민들은 착취당하고 (아모스 5:11, 8:5) 적은 돈에 종으로 팔리기도 했다 (아모스 2:6, 8:6).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착취와 불의한 재판이 벌어졌고 (아모스 3:10), 성적으로도 타락을 일삼았다. (아모스 2:7). 종교적으로도 겉으로는 열심히 제사 지냈지만 (아모스 4:4~5, 5:21~22), 가난한 자들에게서 착취한 것을 성소에서 사용하는 등 피상적인 종교 행위를 했다 (아모스 2:8)


그렇기에 아모스 선지자는 율법을 멸시하고 우상을 섬기는 유다와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사치, 부도덕, 불의를 행하던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였다. 또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축복을 사치와 압제와 불의로 대신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의 거짓 예배를 폭로하며, 정의를 행하라는 권면과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말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가장 근본정신이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율법은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이었다. 그 인간의 이기심을 아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과부와 고아, 그리고 외국인들을 보호하려고 하셨는지는 율법을 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형식도 제대로 남기지 않은 상태로 그저 자기들이 지키고 싶은 대로 율법을 뜯어고쳐서 사용하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 얼마나 나무라셨던가?


지구 전체를 지구촌이라고 부른 지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그리고 그 반세기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상 속에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약자들을 얼마나 살피었는가?


기술의 격차를 먼저 살펴보자. 2018년 세계보건기구 WHO에서 노화를 질병 코드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9년 하버드 의대(Havard Medical School)의 폴글렌노화연구센터(Paul F. Glenn Cen 공동 책임자이며 유전학 교수인 데이비드 싱클레어(David Sinclair) 박사는 40대의 몸으로 120살까지 살 수 있는 약에 대해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5년 내로 약을 시판하겠다는 것이 싱클레어 교수의 계획이다. MIT에서는 와이파이를 연결하면 휴대폰이 충전될 수 있는 기술을 16년 전부터 준비 중이었으며, 일론 머스크는 뇌에 전극을 심어 휴대폰으로 직접 검색하고 뇌로 바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며 인류는 빈부격차에 대해서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A.I를 이용하여 확진자 추이를 계산하고, 상황을 예측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하루에 코로나로 인해서 죽고, 수많은 사람이 확진 걸리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마을에 병원이 하나 있어서 장티푸스와 말라리아를 처리하기도 힘든데 코로나까지 처리를 해야 한다.


빈부의 격차를 넘어선 기술의 격차는 이제 막을 수가 없을뿐더러, 다들 지금 당장 코로나로 인한 본인들의 손익을 따지느라 지구촌의 약자들을 보호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당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선한가? 가끔 간증을 하기 위해서 올라간 많은 사람 입에서 나온 간증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해주셨습니다."라는 식의 간증을 많이 보곤 한다. 그들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부어주셨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자. 내가 이득을 본 것으로 인해 누군가는 손해를 보았다. 자본주의 체제는 결국 돈의 세상이고 세계에 풀려있는 돈은 디지털 세계에 찍혀있는 돈보다 10배 이상 적다. 결국, 그 찍혀있는 돈은 전부 이자, 빚이며 그 돈을 갚기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되어 갚아야만 하며 희생되어 갚는 것은 노동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서로 조금이라도 싼 물건을 찾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 베트남에서 온 물건이 싼 지 중국에서 온 물건이 싼 지 고민한다. 그 숫자에 찍혀있는 현지인들의 고통과 수난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베컴이 축구 광고 15개를 찍으며 구단에서 100억의 연봉을 받을 때, 그 축구공을 만들었던 파키스탄 시알코트 지방의 1만 5천여 명의 어린아이들은 10만 원짜리 공 하나에 150원을 받았다. 우리가 전기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 지구에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제아무리 태양광이니 핵발전소니 하지만, 화학 연료가 6~70% 이상의 에너지를 내는 지금 상황에서 내가 에너지를 씀으로 환경은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 이 미친 듯한 경쟁 체제에서 내가 이득을 봤다는 것은 누군가가 심각한 손해를 봤다는 의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심각한 빈부의 격차와 기술의 격차를 보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슬퍼하고 계신다.


정말 불편한 이야기이겠지만,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 일말의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저자가 이야기한 것을 잘 이해하여 절대 선을 위해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 지금 당장 나는 얼마나 선한 일을 하고 있는가? 저자가 문제 제기했던 것처럼 '교회 봉사' 혹은 '나의 삶에 충실한 것'으로만 만족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6) 종교와 우주개발


사실 이 에세이가 나오는 이유는 '외계인'이다. 그리고 그동안 기독교의 외계인 해석이 어땠는지와 진화론이 계속 외계인을 주장하는 이유를 이해해야 저자의 이야기가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진화론에서 외계인을 주장하는 이유는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이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보수 기독교에서 거꾸로 '지구에만 생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도 같다. 어떻게든 이 두 개의 이론을 섞어보려는 노력이 참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두 개는 섞일 수 없는 이론이다.


진화론을 보면 '죽음'이 '인간'을 불러온 것이다. 진화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나의 다음 세대가 죽지 않고 살아나야 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많은 원시세포가 죽고 수많은 동식물이 죽은 후에 인간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기반으로 한 창조론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불러온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온 우주와 지구, 그리고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저주를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약 이 지구에 생명이 있는 이유가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연한 진화의 결과"라고 한다면 과연 이 넓은 우주에 지구와 같은 조건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별이 있을 것이고, 지구와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진화한 생명체들은 충분히 많지 않겠는가?라는 주장이다.


저자가 이야기한 Fred Hoyle은 사실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주장은 유명한 칼 세이건의 소설과 영화 '콘택트'에서 유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영화 콘택트에서는 "우주에 만약 우리만 있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겠지."(If it's just us, it seems like an awful waste of space.)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세기 1:14)


인간은 천문학을 이용하여 단순하게 낮과 밤, 계절, 날짜, 연도만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여러 징조를 알 수 있었기에 인간은 천문학을 아주 자세히 알아야 했다. 그렇기에 사단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점성술로, 과학이 발달하고 나서는 진화론과 빅뱅 이론으로 천문학을 제일 먼저 망가뜨렸다. 하지만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던 동방박사 무리가 예수님의 탄생일에 맞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들렀던 사건을 기억해보자. 심지어 창조론자들은 이미 그 별을 찾아냈다. 그렇기에 '우주에 외계인이 있을까?'라는 질문은 매우 진화론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장에서 5가지로 하는 것이다.


강한 부정


「이렇게 물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이 모든 당혹스러운 가정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하지요?" 저로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을 밝힐 따름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강해집니다.」 <홍성사 116p>


영혼의 유무


「다른 생물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중에 '이성적 영혼 rational souls'라 부를 만한 것을 가진 동물이 있을까요?」 <홍성사 107p>


타락 여부


「인간 외에 이성을 갖춘 다른 종이 존재한다면, 그중 일부나 전부도 우리처럼 타락했을까요?」 <홍성사 108p>


구원 여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지구 외의 다른 세계에 성육신하셔서 우리가 아닌 다른 종족을 구원하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홍성사 109p>


종 특이성


「다른 세계는 물리적 상태뿐 아니라 영적 상태도 우리와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타락의 종류와 정도도 다를 가능성이 있지요.」 <홍성사 110~111p>

「다른 종의 구속 방식은 우리와 달리 우리의 구속을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홍성사 111p>


그중에서 타락 여부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생각에 정말 눈이 번뜩 뜨였었다. 정말 예전에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던 것 같긴 하다. 차라리 외계인이 존재해서 우리 인류에게 다가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나의 상상을 저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고 있었다.


(7) 세상의 마지막 밤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린다. 그만큼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가지고 장난을 쳤고 대부분이 이단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예수님의 재림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천지창조, 인간의 범죄, 예수님의 초림, 십자가 죽음, 예수님의 부활, 승천, 재림과 심판”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제 마지막 때 중에서도 마지막 때이기 때문에 지금 모든 지식은 예수님으로 모이고 있다. 경제, 사회, 과학, 수학, 역사 어떤 지식으로 보아도 복음이 복음 됨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마지막 장인 재림에 대해서 모든 지식은 증거하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단서는 이것밖에 없다. 심지어는 우리 주님조차도 그때가 정확히 언제일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점점 그때가 가까워 가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큰 흐름만 본다고 하더라도 중동에서 시작했던 복음이 지구의 4분의 1지점인 유럽에 넘어오기까지 1500여 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복음이 다시 유럽에서 다시 4분의 1지점인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기까지 400여 년이 걸렸다. 그렇게 다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4분의 1지점인 아시아로 넘어오기까지 100여 년이 걸렸다. 그렇게 벌써 2020년인 지금 이미 수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있다.


미개척·미전도 종족 선교는 1989년 로잔 마닐라 대회 이후 세계교회의 관심을 받아왔다. 1995년에는 미전도 종족 개척 선교의 중간평가와 계획을 위한 ‘95 세계선교대회’(GCOWE 95)가 한국에서 열렸다. 그 모임을 통해 전 세계 20,000여 종족이 있고 미전도 종족 약 10,000여 종족이 남았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2000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선교지도자대회가 열렸다. 암스테르담 대회에 참석했던 선교전략가들과 선교리서치 전문가들은 단 한 명의 교회 개척 사역자도 없고, 교회도 없는 미접촉종족이 3,000여 곳이 남았다고 발표했다. 이에 암스테르담 대회 전략분과 모임에 참여했던 교단과 선교단체 지도자들은 남아 있는 세계선교의 최대 과업인 미접촉·미전도 종족들을 모두 개척하는 일에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 ‘남은 과업 성취 운동’(Finishing The Task)을 추진키로 했으며, 이후 지속해서 사역을 전개했다. 그 결과 2000년에 약 3,000개였던, 미접촉·미전도 종족은 작년이었던 2019년 약 260개로 줄어들었다.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수는 6,905개로 알려져 있으며, 이 중에서 3분의 2가량만이 그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있다. 약 3억 5천만 명이 사용하고 있는 나머지 2,200여 언어로의 번역이 아직 과제로 남겨져 있던 셈이다. 1999년만 해도 WBT는 성경 번역이 모든 언어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140년에서 150년가량이 소요되리라 예측했다. 당시 여러 단체는 1년에 평균 20개 언어로의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 후인 2009년, WBT는 109개 언어로의 번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여러 기술의 발달이 성경 번역의 속도를 매우 높이고 있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그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것이며, 주님이 오실 날도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기술만 본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에덴동산의 상태를 복구시키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 사건으로 인해 지구는 망가졌고, 영원했던 우리의 수명은 죽음을 만나 900살로 줄었다. 또한 남자는 노동을, 여자는 육체의 고통과 함께 아이를 낳게 되었다. 노아의 방주 사건으로 인해 추위와 더위가 생기고 날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홍수 사건 이후, 육식을 시작했고 과학적으로는 이때부터 산소 농도의 감소로 인해 상처의 회복력이 줄었다고 예상한다. 고통이 극대화된 것이다. 인간의 수명 역시 900살에서 400살이 되었다. 그렇게 바벨탑을 쌓은 후 언어는 나뉘고 수명은 400살에서 200살로 줄었다.


물론 오순절 사건을 통해 영적인 언어의 장벽은 허물어졌지만, 육적인 언어의 장벽은 20세기에 들어오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영어를 통해서 해결될 줄 알았던 언어의 장벽은 정작 영어가 아닌 컴퓨터를 통해 허물어지는 것이다. 010101만 있으면 모든 언어는 서로 통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외국에 나가 언어가 안 통하면 여러 통역기를 겨서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육식뿐 아닌 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인간은 드디어 수명을 정복해가기 시작한다. 불치병으로 불리던 많은 병의 치료법을 찾는 것에서 만족하지 못한 인간은 결국 2018년 WHO에서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한 것이 무서울 정도로 하버드 대학교의 싱 클래어 박사는 40살의 신체 나이를 가지고 예상 수명 120살까지 될 수 있는 약의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5년 내로 상품화하겠다는 것이 싱 클래어 박사의 목표이다.


진화론의 기본 개념은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와 상관없이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존재이다.'이다. 그 개념대로 인간은 진화론의 끝을 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결국 그 정점인 인조인간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A.I의 개발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이제 하드웨어의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기계 인조인간의 외형은 불쾌한 골짜기를 조금만 넘으면 되는 수준에까지 따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제일 가성비가 떨어지는 상품이기에 일본과 한국에서만 개발이 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97년 계단을 오르내리는 로봇, 2000년 걷고 경보가 가능한 로봇을 넘어 2006년 휴머노이드는 드디어 뛸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미국과 여러 기업의 갑작스러운 참여를 통하여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많은 행동들을 거의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동물, 생물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드는 기술은 이미 윤리적 문제를 떠올려야 할 기술의 발전까지 마무리되었다.


현대적 바벨탑이라고 할 수 있는 진화론이 이제 막바지를 보인다. 과학자들은 결국 영혼의 유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몸의 부품들을 하나씩 기계로 바꾼 인간과 인조인간으로 만들어진 기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둘의 차이를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인조인간에도 투표권을 주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때가 되면 인간에게 정말 영혼이 있는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加來道雄 (카쿠 미치오, 일본계 미국인 물리학자)


어떤 방향의 지식을 통해서 보든지 상관없이 주님 오실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느껴야 할 감정은 두려움이 아닌, 염두와 희망, 안타까움이다. 온 세상의 참 주인이 오셔서 진정한 공의와 사랑의 통치가 시작됨으로 사라질 불의와 죄악들, 그리고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의 고통이 끝날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과 가까워진다는 지속적 염두와 그들을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되게 해줄 수 있다는 희망, 지상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함으로 천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한 우리의 안타까움은 계속돼야 할 줄로 믿는다.


「정말 중요한 일은 늘 종말을 두려워하(거나 소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홍성사 140p>

「그것은 오류 없는 심판일 것입니다. 나한테 유리한 내용인데 혹시 잘못된 것이면 어쩌나 겁낼 일도 없고, 불리한 내용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자의 말씀이 우리 모습을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꼭 그대로 보여 주고 있음을 믿고 알게 될 것입니다. 공포에 질리거나 기쁨에 사로잡힌 채 전 존재로 의심의 여지 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홍성사 144p>


#크리스천독서모임 #독서모임 #CS루이스 #홍성사 #글쓰기 #서평 #기독교 #크리스천 #청년부 #청년모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