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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한 사람의 인생은 백 사람의 인생과 마찬가지다.

‘제법 안온한 날들’

by 시크seek

[M_Book #7] ‘제법 안온한 날들’ by 남궁인


* 크리스천 독서모임으로 남궁인의 '제법 안온한 날들'(문학동네)을 진행했고, 독서모임 내용을 나누기 전에 먼저 그중 한 멤버의 서평을 올린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서평: 김영광_오륜교회)

SE-84f579f0-49dd-4f36-9484-3c48df7ea2b0.png 2020 크리스천 독서모임 <제법 안온한 날들> by 남궁인


나에게 여러모로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첫째로는 한국 정서 특유의 ‘감성’이란 역점에 내 시선을 맞추기에는 아직 괴리감이 들기 때문이다. 한국 인문•철학 서적들을 힐끔 봐도 중점이 감성, 정, 그리고 서정적인 문화평론이다. 극단적인 마오이스트 알랭 바디우가 ‘사랑을 위해 싸우는 낭만의 투우사’라고 소개되니 말이다. 왜 똑같은 내용의 발라드들이 수백 가지 제목들로 환생하는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상투적이고 진부한 멘트들과 허공의 ‘당신’과 ‘그녀’들이 초반부에 등장했을 때 수두룩한 (요즘 들어 핫한) 흐지부지하게 애착과 고착을 다루는 단락 모음집 중 하나인가 했다.


하나 그 표면에 듬성듬성 깊은 데서 뿜어 나오는 염원, 허무함, 희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실밥 뽑으며 파헤치는 진정성이 가슴을 쥐어짜기 시작했고 또 내가 저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 네게 비탄을 안겨주었던 요소는 꾸미지 않은 현실 속의 변천사들이었다. 혹독한 자기 계발, 셀프마케팅, SNS 중독 등등을 과거에는 비판적으로 신자유주의 피로사회와 그 병리를 가리켜 읽었다면 이제는 평온한 백조의 자태 밑 발버둥 치는 다리가 보인다. 떠있기는 힘들지만 생명줄을 놓고 싶지 않은 이들의 도전이 보인다.


응급실이라는 ‘전쟁터’에 나가며 고통에 동참하는 의사, 그리고 수술하듯 메스로 인생을 요리조리 다방면 파헤치는 작가 - 죽어가는 자살시도자들의 고통에 뒤틀린 발작부터 고되고 궁핍한 인생을 살다 허무한 끝을 맞이하는 이들까지 수많은 죽음들이 그의 가슴에 파편으로 박혀있었고 세심한 그에게 공황장애와 외상후스트레스가 왔을 수밖에. 따라서 저자에게 사랑은 삶 속의 색채나 도피의 요소보다는 삶의 전부요 지탱하는 이유가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을 찾고 참담한 현실에 온기를 불어넣으려 고통에 동참한다. 인간의 병리와 연약함과 결말과 동고동락하다 보니 다른 건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이 장담하는 것이 있다면 인생에서 두 가지는 확실하고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사랑과 죽음. 아이러니한 것은 둘 다 현상 밖으로는 설명하고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터의 단편소설 ‘우리가 사랑을 논할 때 무엇을 논하는가’는 사람들 사이 사랑의 견해 대립뿐만이 아니라 평생 안주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급함을 묘사한다. 격한 논쟁 끝에 답은 주어지지 않고 등장인물들은 사랑에 젖듯이 취해 그 몽롱함에 말이 끊기고, 그 정적 속에 박동하는 심장전문의인 주인공의 심장 소리로 글은 마무리 짓는다.


삶과 얽혀 있지만 채울 수 없는 그것이 (objet petit A)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참 사랑을 어렴풋이 알 수밖에 없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아니면 그 둘의 불안한 융합체가 사랑의 이름을 도용하여 소유욕과 갈증으로 대체하곤 한다. 그래서 사랑이 때론 염원에서 증오가 되고 추격전으로 전략하고 취했다가 깨는 마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쫓고 쫓기는 현상학은 결국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고 (Schopenhauer), 사랑은 (Amor) 타락한 인류의 몸부림을 가리키는 명칭이 된다. 타인을 통해 잡히지 않는 그 사랑의 대상을 찾아서. 무신론자들도 결국 신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이던 부재이든 간에. 사랑이 특정 대상을 포함하면서도 넘어서면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의미와 우주의 광활함이 되어주는, ‘그대’를 향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이제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위해서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어떤 다툼과 미움도 없고 감정의 소모도 없기에 편안해서 지루할 정도로 영원한 시간을 조용히 둘이서 보낼 텐데. … 무한한 말을 나누는, 그 시간과 육체의 종말을 같이 기다려주는 당신이, 당신만이 남아 있는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이제 막 내려앉는 봄과 영원히 가닿지 못할 것 같은 햇살을 향해 뛰어나갔다.” - p.148


그 대상을 끝내 찾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없는 허공으로 추락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예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도리어 저자의 응급실에서 불변의 법칙 아래 수긍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저자는 아무리 자신이 따뜻함을 나눠도 그 누구도 그 온기를 삶의 국경 밖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고통에 동참해도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 없음을 잘 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이 문제의 해답이다.


하지만 많은 이의 눈에는 우리가 마케팅하는 예수님이 저자보다도 더 무능해 보인다. 그들이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차이를 납득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주님의 대사로서 기독교인들이 남들의 고통과 고난을 경청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시인 A처럼 남의 고뇌와 세상의 참혹함을 술로 풀어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국민들이 불교나 천주교인들에 대해서는 ‘온화한’ 감정을 느끼고 개신교인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싶은’ (32%), ‘이중적인’ (30%), ‘사기꾼 같은’ (29%), 이기적인 (27%), 배타적인 (23%) 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기독교 실천학이 안온하기는커녕 냉담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평판으로 볼 수 있다. 의사들이 가난을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라 여기고 대하듯이 사회경제와 공중보건은 사후 두 갈래길을 확신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전쟁터이다. 그런 상황에 이젠 총알도 못 쏘겠는 셈이다.


따라서 두 번째 난관은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300장이 넘는 이러한 관측들을 소화하는 데 있었다. 그저 눈물만 난다. 한국어가 딸려서 다 풀어놓진 못하겠지만 작은 소견 하나를 내려한다. 엄밀히 말하면 죄와 사망의 법의 최종 결말은 남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라는 선물을 주시지 않는가. 꿋꿋하고 불평 없이 살아온 휠체어 탄 가장과 그 가족, 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음에도 아이를 안고 그저 만족하는 중국인 부부. 그런 식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 속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남들에게 주님이 주되심을 입증할 수 있다. 오직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으니 우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나누는 절대적인 참사랑과 평안을 누리며 고통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환우들을 돌보다가 예수를 영접하거나 최소한 기독교를 수용하게 된 사회복지 종직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저자같이 사랑이 나의 신적인 존재였다. (비슷한 시들도 많이 써 왔어서 책을 읽으며 소름이 든 게 세 번째 어려움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나주신 후 오히려 하나님이 사랑이 되셨다. 물론 나는 달의 안전한 앞면에 있고 저자는 달의 뒷면에서 고통의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p. 240) 이 현실을 주관하는 신을 납득하고 싶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 오셔서 신에게마저 버림받고 온 세상의 부패함을 짊어지신 예수님은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타인을 돕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 헌혈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물질이 남는 봉사다. 이 단순한 교환은 다른 어떠한 존재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이 나누는 분명한 인류애다. 인간을 돕고자 고민하는 사람에게 헌혈을 권한다. 이타적인 당신의 혈액만이 다른 인간을 살릴 것이다.” - p.218

다른 어떠한 존재도 인간 고유의 죄와 고난을 대체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서 이를 이루신 것 아니겠는가. 보혈의 피로 우리 모두를 살리셨다. 최후승리를 바라보시며 십자가를 감당하심도 예수님께 조금이나마 안온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싸늘하고 공허한 현실이 주님의 마지막 숨까지 처절하게 앗아갔을까.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등지고 싸운다는 것이, 죽음을 직감할지라도 이토록 안온한 것이었을까요.” - p.152

저자의 글이 왠지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을 연상시킨다. 우리도 이런 사명감이 있는가? 이런 안온함을 실질적으로 느끼는가? 이제 우리 등 뒤에서 도우시는 주님을 힘입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임무가 시급하다. 우리에게는 세상 핍박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변수들로 먼지 같은 인생 길에서 궁극적으로 운명이 좌우될 수십억 명이 안온함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숨어 지낸 11 제자의 모습을 부활 이후 시대에 재현하지 말자.


팀 찰리스 목사의 소견으로 마무리하겠다.


“현대 복음주의의 얄팍함은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대체로 불충분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절망적이고 목적이 없는 자에게 희망을 주고 슬픔만을 아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려면 성서에 바탕을 두고 교리적으로 만족스러운 답을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 사랑, 슬픔, 고통이라는 어려운 교리와 씨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는 희망에 대한 답변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통과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와 영원토록 희망을 주는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피난처를 구하게 하는지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깨달은 것은 폭풍으로 집이 날아가 버린 가족이나 아이가 병으로 쓰러지는 것을 막 지켜본 사람에게 제공할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씨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야곱처럼 각자의 얍복 나루에 나아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하는 걸 볼 때 우리는 공감해주기는커녕 정곡을 찌르는 조언조차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거라 내던지지요. 하지만 고난의 현실 앞에 그들은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고통받는 걸 허락하시는 거죠? 왜 날 괴롭히죠? 왜죠?


우리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만물에서 하나님의 패권과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에게 책임을 앗아가지 않는 답변이 필요합니다. 마크 탈봇이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결코 책임을 회피하기 원하시지 않습니다. (God does not want to be left off the hook).” - in The Shallowness of Evangelic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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