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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살린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by 시크seek

[M_Book #12]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불과 몇 년 전 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때가 있다. 방송과 인터넷 등의 매체에서 인문학에 관한 강의가 한창 붐을 일으켰고, 서점에서는 관련 서적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제법 히트를 쳤다. 실로 모든 것을 인문학에 접목시켜 재해석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인문학(人文學)’을 ‘인문학(人問學)’이라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인문학에 대한 정의와 해석 그리고 적용이 각양각색이었다는 점이다. 질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어느 누구라도 인문학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 특히 인문학을 이끌어 가는 두 기둥 즉 ‘질문’과 ‘사유’가 인문학의 힘이자 매력이었고, 이는 대한민국 사회에 다양한 의제를 던졌다.


그런데 인문학을 신학과 접목시켰을 때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생겼다. 지나치게 신학을 숭상한 까닭이다. 일부 목사나 그리스도인들의 몰이해 속에 인문학이 신학을 대적하는 학문으로 프레이밍이 되었다. 해서 불필요한 심지어 사특한 학문으로 치부된 것이다. 이는 당위성이 담보되지 않은 억측이며, 편견이자 왜곡이다.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이다. 기독교로 치면 인간이 접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이성과 영성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힘쓰는 것이다(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영성을 아득히 초월한 분이다).


신학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고, 이 땅에 성령의 임재를 통한 섭리하심과 다스리심도 포함되어 있다(소요리문답 참고). 그러니 인문학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덧대어 모든 학문은 신학을 보완해주는 지식이자 지혜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다면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 가운데 이뤄짐을 또한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라고 마냥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다. 신학(신앙)의 견고한 진을 세워간다면 오히려 인문학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주님의 기쁘신 뜻을 행할 수 있는지 연구하고 헤아리는 적극적 입장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를 통해 사회와 과학, 문학 등에 기여한 공로도 분명 크지만 반대로 인문학의 부재 속에 기독교의 독선과 아집으로 역사적 발전을 저해한 뼈아픈 실책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세상을 알고,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고민하며 조금 더 발전적인 미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마땅한 사명이다. 고로 인문학 역시 과학이나 의학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은 인문학을 고민하고 낯설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읽어봄직하다. 당연하게도 100세 즉 상수(上壽)를 넘긴 노(老) 교수의 깊은 철학적 사색과 노련한 지혜가 묻어 나오기도 하지만 “인문학의 꽃은 예수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크리스천의 심장을 두근대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근간에 둔 학문이야말로 인류의 행복과 발전을 주도해왔으며, 그 사랑을 사악하게 왜곡시킨 신념들은 인류에게 불행의 덫을 놓고, 쇠퇴의 독약을 뿌려왔다.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 불의한 청지기를 다룬 이 예화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 성경은 특별 계시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안다고 해서 성경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무시한 신학적 접근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는 자가 되려면 바르고 견고한 신학의 토대 위에 과학, 의학, 문학, 예술, 사회, 심리, 역사 등에 나타나는 인문학을 아는 것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 일반 계시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함은 물론이다. 그 자리에 사명을 품고, 탁월한 지식과 재능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통해 마음껏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고통으로 번민하는 이웃과 슬픔을 나누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을 다스림에 대해 탁월하게 강해하면서도 역사의 강자에게 비굴하게 굽실댄다면, 자기 중심성이 가득한 심령으로 진리를 기만하는 이들을 향해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믿음으로 신학을 대했단 말인가?


해서 이 책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살리고,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는 노 교수의 진중하고 진솔한 이야기 앞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면한다. 철학이 가미되다 보니 다소 따라가기 어려운 내용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읽어보면 더욱 그 진가를 음미하게 되는 사골곰탕 같은 글이다. 인문학으로 시작한 마음이 어느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는 필자의 바람이다).


201607152124_61220010785550_1.jpg 김형석 교수, 출처 C채널 '김형석 교수의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밑줄 그은 문장들


“왜 공산주의 이념이 성공하지 못했는가? 자유와 인간애를 거부했기 때문이다.”(p.57)

“반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은 참 신앙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양심적이거나 반도덕적인 신앙은 종교의 길이 아니다.”(p.61)

“종교인들의 뜻은 항상 높은 데 있다. 그들의 이상적 삶은 성자들의 삶이며 고원한 진리의 교훈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신자들의 현실적 삶이 그런 위치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 높은 가치를 버릴 수는 없으니 그 대신 붙잡는 것이 형식과 계명과 율법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주의자, 율법주의자, 계율주의자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교만, 고집, 독선 같은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아야 하는 인간성이다.”(p.112)

“신앙은 내 생명과 전 인격을 건 도박이다. 잃게 되면 자아라는 전체가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나 얻게 되면 자아는 물론 영원과 삶의 실재를 차지한다. … 신의 참여인 것이다.”(p.118-119)

“많은 사람들이 종교라는 분위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살리려는 데서 교만, 고집, 독선이 자랐던 것이다. … 종교적 본질을 깨닫지 못했든가 자기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참 신앙의 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종교 안에서 악의 협력자가 되고 신앙의 베일을 뒤집어쓴 아욕(我慾)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p.119-120)

“본래부터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시간과 역사 위에 나타내며 이루어지는가로 알 수 있었다. 기독교는 언제나 구체적이며 생명력 있는 현실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가 객관적 타당성을 얻는 길은 역시 신앙의 역사와 신앙을 가진 이들의 역사적인 활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p.191)

“영원한 진리란 언제나 새로우며 현실을 움직여 구원과 생명을 약속하고 실현시키는 진리이다.”(p.212)

“사람들을 향해서는 ‘우리가 이렇게 위대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는 위치로 떨어져 버린 것 같다.”(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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