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늘 낙산공원 올라가지 않을래요?”, “여기 정말 예뻐요, 이따 끝나고 서울 식물원에서 볼래요?”, “날씨 정말 좋네. 한강에서 초밥, 고고?”, 이외에도 함께 걸었던 남산, 북한산 둘레길, 청계천, 서울숲, 북서울 꿈의 숲, 인사동, 삼청동, 대학로, 올림픽공원, 미사경정공원, 석촌 호수, 남한산성,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서울과 근교의 수많은 곳들.
짝꿍은 걷는 걸 좋아한다. 시간 날 때마다 여기저기 걷는 것이 그녀의 몇 되지 않는 취미다. 느릿느릿 걸으며 정취를 살피고, 근처에서 풍기는 달달한 냄새에 이끌려 맛집 탐방하는 것에 소박한 기쁨을 찾는다. 반면 산티아고 순례길, 안나푸르나 서킷+ABC 트레킹, 잉카 트레킹 등 세계 3대 트레킹을 모두 섭렵한 나는 걷는 기쁨을 그리 여유로운 마음으로 누리지 못한다. 그저 치킨 뜯으며 야구 보는 것이 좋고, 직접 서점에 가서 몇 시간이고 책에 둘러싸이다 새 책 냄새에 취해 구매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짝꿍은 한화 이글스 팬이다. 당연히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지만 주변 한화 팬들은 대체로 성품들이 사려 깊고, 온화하다. 좌절과 역경 속에서 참을 인을 새기며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되 결정적인 순간 일당백의 전투력을 보인다. 특히 한 줄기 빛에도 감사로 반응하고,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는 데는 도가 텄다. 기아 타이거즈 팬인 나는 어찌 됐건 감독과 선수들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기에 악플을 달거나 비난하지 않지만, 경기 결과에 아니 경기 중에도 일희일비할 때가 많다. 또 데이트 중에도 야구 경기에 몰입할 때가 종종 있는 편이다.
짝꿍은 공유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오늘은 누구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미묘한 감정과 시선을 캐치해 배려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존재를 존중하고, 함께 하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사소한 변수도 대비하는 까닭에 모임은 늘 계획된 통제 속에 안정을 유지한다. 이와는 반대 성정인 나는 상대방을 신뢰하며, 가능한 독립적인 생활을 존중하자는 주의다. 이에 덧대 변수나 열린 결말에 마음 어려워하지 않으며, 리스크가 있는 도전에 오히려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다르다. 삶의 결이 아주 다른 두 사람이 만났다. 그럼에도 아직은 다툼 한 번 없이, 마음 상하지 않고 잘 만나고 있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어거스틴,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 모든 일에는 자비(사랑)를!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데이트할 때 그리고 앞으로를 그릴 때 우리는 항상 ‘본질-비본질의 법칙’을 적용한다. 가령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천 이성교제에 있어서 본질이다. 때문에 만남에 있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것’을 지칭하는 말이기에, 우리의 만남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누군가를 실족시키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항상 살피려고 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 역시 우리 만남에 있어서는 본질이다. 당연한 얘기다. 우리는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잠깐 계약을 맺은 사이가 아니다. 평생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며, 곁에 있어주기를 약속한 사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만남의 절대적 명제이자 다른 이유나 상황으로 변질될 정체성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타협하며, 조율하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이전 삶의 형태를 배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가령 위에 나온 예들이 그렇다. 나는 짝꿍을 만난 이후 어지간한 길을 걷는 데 도가 텄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낮에도 밤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손잡고 같이 걷는 길의 옅은 떨림이 우리 데이트의 시그니쳐이자 백미가 되었다.
또한 매일 영상 통화를 하면서 하루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수시로 카톡을 통해 점심 메뉴는 뭐였는지, 오후에는 누구랑 대화했는지, 오늘 어떤 일과를 수행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나눈다. 일일이 보고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던 나는 죽었다. 내 영역을 투명하게 오픈함으로써 더 깊은 신뢰를 형성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함께’를 도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아 팬인 나는 잠실 한화 경기를 보러 가서 열심히 ‘나는 행복합니다’를 흥얼거린다. 인연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연애는 상대방과의 밀당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 가치를 높여 상대방과의 관계 우위를 점하려는 행동 이론이나 심리 게임이 아니다. 어떤 조언과 방법론도 상황에 맞는 완벽한 솔루션을 제공할 수 없다. 자신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상대방에게 실망하고 화 낼 필요도, 자격도 없다. 특히나 주도권 싸움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존재로부터 감사와 기쁨을 찾는 기회를 빼앗아 간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크리스천 연애는 서로의 삶과 인격에서 무시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해야 한다(* 윤리적인 선을 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인연을 이어가기 어려운 경우, 그 사람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길 마음껏 축복하고 보내주는 것이 좋다).
한 마디로 “연애는 끊임없는 자기중심성과의 싸움”이다. 내 정욕과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거짓과 나태함이 관계 속에 들어올 때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발화가 될 수 있다. 관계 안에서 예수님의 함께하심이 보이지 않으면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만남을 통해 작은 천국에 대한 기대함이 사라지면 쉬이 무료하고, 지치게 된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다. 나보다 상대방을 위해 줄수록 내가 행복해지는 궁극의 아이러니다. 내가 한화 이글스를 같이 응원하는 이유, 내가 전에는 해 본 적이 없던 일상을 주절주절 얘기하는 이유, 내가 걷는 기쁨을 이제야 알아가고 있는 이유,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랑하는 이가 있기에 쉽게 가능한 일들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짝꿍에게 변하지 않고 하는 말, 계속해서 지키려는 행동이 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진심이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사랑의 기저다. 책임감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적극적인 애정표현이다. 그래서 짝꿍이 불안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일에는 가능한 한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을 하든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고자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이끌어 가고자 한다면 결코 건강한 애정이 형성될 수 없다.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가 있는 자리에는 실망과 이기심이 자리할 틈이 없다. ‘자기중심성’을 이겨낼 때 비로소 커플 사이에 그리스도의 평강과 은총이 이미 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겨울이다. 어제오늘 눈이 많이 내린다. 코로나 19로 다들 마음이 어려운 시기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언제나 내 편’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지는 때다. 연애를 또 결혼을 고민 중인 그리고 관계 진전 중인 크리스천들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세상이 주는 안정감에 기대어 끊임없이 상대방을 비교 평가하며, 주도권을 움켜쥐고자 번민과 걱정으로 미래를 맞이하겠는가?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연합과 겸손이 가져다주는 희락을 누리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기쁨으로 천국을 누리겠는가? 같은 데이트를 하는데도 천국과 지옥이 나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