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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젊음처럼 슬픈 게 또 있을까?"

'욕망의 페르소나'

by 시크seek

[M_Book #20] '욕망의 페르소나'


“덧없는 영광을 얻으려고 우리의 탁월한 행위들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생각에 맞서: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 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잠언 27:2) -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안티레티코스>,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2015년), p.189; 재인용 김기석, <욕망의 페르소나>, 예책(2019년). p.111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의 십자가 길을 따라가겠다는 순전한 고백(눅 9:23)보다는,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데 거침없이 사용하겠다는 사명(마 19:21)보다는, 부의 추월차선을 달리고 싶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주목받고 싶고, 제법 괜찮은 이성을 만나 결혼하고 싶은 욕망이 은밀하게 꿈틀댄다. 익숙하지만 제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각종 추상적인 기독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이익의 동기로 얼룩져 있기도 하다.


함께 있어 주는 시간이 필요한 영혼에게 쏟는 에너지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맘몬의 세계관으로 점철된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는 언제나 반색한다. ‘질서’라는 말 뒤에 교묘하게 숨겨둔 ‘위계질서’를 통해 상급자의 편의에 맞게 통제하려 드는 셈법은 또 어떤가?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자화상이 일그러져 있을 때 주님은 회심의 마음을 건넨다. “어리석은 십자가가 세상을 구한다”는 작가의 말은 세상을 바꿀 아무런 힘이 없어 전전반측하던, 아니 자신의 양심조차 가누기를 힘겨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벅찬 감격의 기대를 노래하게 한다.


물론 욕망을 마냥 사특한 개념으로 프레이밍해서는 안 된다. 욕망의 발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류의 발전을 추동시킨 원천 중 어떤 것들은 이타주의로 점철된 선한 욕망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욕망이 발현되는 과정이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경우 우리는 다시 원점에서 차분히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누군가의 욕망이 또 다른 누군가의 생존 권리를 불온하게 짓밟아버리지는 않은지, 즉물적인 계산의 논리로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고 비애를 끌어안은 이들의 흐느낌을 내버려 두지는 않는지 말이다.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는 하나님과 만나고, 예배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본연의 의미대로 우리가 교회이고 또한 교회로 살아간다면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의 원천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자기도취적인 야망인지, 십자가의 희망인지 말이다. 코로나 19 시대에 초점 없는 진영 논리를 선동하며, 교회의 이익을 탐하며, 도무지 예수가 보이지 않는 욕망이 결집된 공동체에 그리스도의 평강과 은총이 임하기는 만무하다.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세상은 초월자의 암호가 가득한 곳”이라고 했다. 이를 다시 신학적으로 얘기하면 “세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반 계시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다. 만사에 하나님을 발견하는 우리는 그래서 말씀 앞에 경건하게 서야 한다. 그것만이 유한적인 존재가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다. 나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드는 데 브레이크를 걸 유일한 기회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은 장로교나 침례교 등에 소속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다소 낯설 수 있다. 반대로 얘기하면 대부분의 교단에서 좀체 다루지 않는 ‘하나님의 것’들을 다양하게 논의하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그의 책을 다룬 이유다. 종종 쉽게 읽혔으면 하는 문장에 낯선 단어를 힘주어 놓는 것이 조금 못마땅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맵시는 매력적이며 독자로 하여금 현재의 자리에서 성찰을 통한 발전적인 모색을 고민하게 한다. 크리스천 독서모임 도서로 선택한 김기석 목사님의 또 다른 저서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와 <버릴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역시 추천한다.


더불어 이 책의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몇 가지만 남겨 둔다.

SE-ffd8aaf9-d62a-4bf4-9001-5a1a9ead5117.png 크리스천 독서모임 <하늘이음> 1기; 욕망의 페르소나


"누가 정당한 몫 이상의 대우를 받으면 화가 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감정이 ‘네메시스’ 즉 ‘의분’이며, 이 감정이 중용을 지키면 덕이지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악이 된다고 말했다. 그 감정이 지나치면 친구가 잘되어 칭찬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하게 되는데, 이것이 ‘프토노스’(phthonos) 즉 시기다. 반대로 그 감정이 모자라면 친구가 대우를 받지 못하거나 낮은 자리로 내려갈 때 은근히 기뻐하게 되는데, 이것은 ‘에피카이레카키아(epikairekakia) 즉 ‘심술’과 ‘고소히 여기는 것’이다." p.15

"그 악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나의 ‘있음’의 근거가 내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놀람으로 자각할 때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는 신비로 다가온다." p.25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지 않는다." p.32

"신앙은 결단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확고히 붙잡아야 한다." p.36

"과거의 안락한 토대에 기대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기 삶을 거는 행위야말로 신앙적 행위다." p.41

"권력과의 긴장은 참된 종교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p.57

"경쟁을 삶의 원리로 삼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공동체적 연대는 느슨해지고, 존재론적 쓸쓸함이 우리 삶을 확고히 포박한다. 서로에 대한 환대의 마음이 흐릿해질 때 적의가 슬며시 우리 의식을 장악한다." p.83

"금식은 음식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끊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에 응답하며, 그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라는 것이다." p.99

"어떤 만남은 우리 삶의 지속성을 차단하고, 생각해 보지도 않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p.161

"그릇된 욕망의 문법에 따라 살던 삶에 작별을 고하고 예수가 보여 주신 새로운 문법에 따라 삶을 재조직해야 한다.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한다." p.174

"애쓰고, 추구하고, 버텨 내는 그들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은 움터 나온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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