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침팬지를 이기지 못하는가?”란 질문이 도발적으로 느껴진다면 책은 독자를 상대로 소위 ‘어그로’를 잘 끌고 있다. ‘과연, 설마’하는 마음으로 반문하려는 독자들을 향해 저자는 하나의 결론을 미리 보여준다.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되었을 때 그러한 경우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는 머리말에서 설득의 재료로 사용할 강력한 예시 하나를 꺼낸다. 사람들은 식도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에 대해 공포감을 느낀다. 직관 혹은 무지에 근거한 이유다. 때문에 ‘턱을 앞으로 빼면 식도가 똑바로 펴진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한 남자가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국자 손잡이를, 이후 1809년 산 스웨덴 군용 검을 목구멍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한다. 본능에 압도된 사람들의 인식을 ‘사실충실성’으로 깨부수고, 세상에는 생각보다 가능한 것이 훨씬 많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칼을 식도로 밀어 넣은 당사자, 통계학자이자 의사인 한스 로슬링은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가 세상을 오해했음을 알았을 때, 당혹스러워하기보다는 아이 같은 궁금증과 영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가 생전에 연구 분석하고 저술한 <팩트풀니스(factfulness)>는 ‘느낌’을 ‘사실’로 인식하는 인간의 10가지 비합리적 본능(간극 본능, 부정 본능, 직선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일반화 본능, 운명 본능, 단일 관점 본능, 비난 본능, 다급함 본능)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사실충실성’ 실천하기를 제안한다.
머리말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13문제를 출제하고 있다. 장기간 세계일주를 다녀온 경험을 자신감의 연료로 삼아 도전, 기대보다 적은 7문제를 맞혔지만 의외로 우수한 득점이라는데 놀랐고(전체 정답률 33%), 예상을 크게 빗나가는 답들을 확인하며 한 번 더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책에서 묻는 13문제는 이렇다.
‘세상은 둘로 나뉜다’는 거대 오해 즉 ‘이분법’은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가 가진 처음 인식일지 모른다. 우리는 맞닥뜨리게 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두 집단으로 나누고, 그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을 상상한다. 남성과 여성, 여당 지지자와 야당 지지자, 총기 소유 찬성파와 반대파, 개발론자와 환경주의자, 동양과 서양 등등. 이 간극 본능은 실로 흔하며, 매력적이다. 데이터를 근본적으로 왜곡하는 것으로 자기 진영의 관심과 지지를 결집시킬 수 있고, 일을 그르쳤을 때 손쉽게 상대방에게 비난의 화살을 쏨으로 헤게모니를 유리하게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간극 본능을 자극하는 세 가지 신호가 있다. 첫째는 ‘평균 비교’다. 사람들이 무언가 판단할 때 많은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편하게 해석하려는 경향을 이용하는 것이 ‘평균’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균으로 절대적 명제를 도출했을 때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생긴다. 하나는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현상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극단 비교’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를 대상으로 어떤 통계를 내자면 당연히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개는 중간층에 다수가 존재함으로 극단 비교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언론을 포함한 각종 선전들은 극단 비교를 통해 문제를 문제화시켜 더 큰 문제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물론 중도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이다. 당연하게도 높이가 높을수록 낮은 곳의 상황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책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재벌 총수들은 고시원에 사는 이나 대출을 끼고 전세에 사는 이, 그리고 자가에 사는 이를 모두 ‘서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시원에 사는 이의 평생 꿈이 내 집 마련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평균 비교’와 ‘극단 비교’,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 각각의 오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간극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한스 로슬링의 제안은 무엇일까? “현실은 그렇게 극과 극으로 갈리지 않는다. 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사실은 대다수가 존재하니, 다수를 보라”. 그런 면에서 극단적인 사회 계층을 제외한다면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평균적인 범주 안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주는 안정감이 상당할 뿐더러,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검증들이 시기와 방법을 두고, 적절히 진행되었을테니 말이다.
[2장: 부정 본능, The negativity instinct]
정말로 세계는 점점 나빠지고 있을까? 개인적인 흥망성쇠를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그렇게 여기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스 로슬링의 주장은 일관된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극빈층은 줄어들고 있고, 기대 수명은 늘어나고 있다. 여러 질병들에 대해 대처가 되고 있고, 교통과 통신은 날로 발달하고 있다. 여성의 투표권이나 탈문맹률, 아동과 청소년의 암 생존율이 좋은 쪽으로 개선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통계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요인으로 세상은 전보다 살만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지표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fact)이 진실(truth)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삶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앞선 <팩트풀니스> 인트로에서도 언급했듯 미국의 자살률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으며(또한 OECD 국가 중 선진국에 속하는 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 해마다 전 세계 피난민 숫자 역시 늘어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안정적인 ‘9 to 5’의 일자리가 계속 줄어들고 있기도 하며, 코로나 이후 많은 국가에서 고용주가 필요로 하는 시간대만 근무하는 ‘제로아워 컨트랙(zero hour contract)이 증가하고 있기도 하다(미국 4.9% 실업률의 이면: 점점 사라지는 9 to 5 일자리 그리고 유럽의 고민). 또한 “이미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은, 도시의 변두리로 숨고, 소리도, 냄새도 지워집니다. 그 지워져 가는 곳에도 사람이 있습니다.”라며 한 인터넷 사이트에 통찰력 깊은 글을 남긴 '자영업자가 본 고용시장에서의 가난 요인'이란 글은 통계나 지표로만은 해석되지 않는 보다 나은 삶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한다.
한스 로슬링은 역시나 이러한 반론을 예상한 것 같다. 그는 사실충실성에 의거해 부정 본능을 억제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데이터와 그것에 기반한 주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여기는 것은 ‘느낌’이지 ‘생각’이 아니다. 언론은 부정적인 이슈를 선별적으로 보도하고 있고,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보다 전달될 확률이 훨씬 높으며, 점진적 개선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가 접하는 자극적인 소식들로 인해 혼동하지 말 것을, 오히려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이 좋아졌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고 조언한다. 이에 덧대 사람들은 유년의 경험을, 국가는 자국 역사를 곧잘 미화하기 때문에 장밋빛 과거를 조심할 것을 추가로 언급한다.
일견 한스 로슬링의 관점이 옳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디 건조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객관적으로만 인식하는 생명체인가? 어떤 이는 단지 살벌한 취업이나 고시 경쟁률을 보고, 세상이 점점 더 살기 나빠지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다. 이렇듯 부정 본능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분별력은 물론 언론(기능을 갖춘 모든 방법)의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저자가 주는 인사이트가 있다. 부정적인 상황에 함몰되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 이면에 개선되는 상황을 주시하며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는 존재이기에 부정 본능을 억제하며 보다 나은 자신과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분투하는 한, 세상은 분명 더욱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