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 본능’과 ‘운명 본능’, ‘단일관점 본능’
<팩트풀니스> part 3: ‘일반화 본능’과 ‘운명 본능’, ‘단일관점 본능’
[6장: 일반화 본능, The Generalization Instinct]
우연히 ‘유퀴즈’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 편을 보았다. 별생각 없이 라디오처럼 켜 놓고 있다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거꾸로 보는 태도”를 보면서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학교 조직도를 거꾸로 보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총장이 누굴 섬겨야 할지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말, 겉으로는 누구보다 학교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세상의 편견을 깨기 위한 행보를 보이는 이광형 총장의 진솔한 고백이 깊이 와닿았다. 젊은 시절, 나 역시 종종 그런 생각을 해왔고,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7년 동안의 장기 세계 일주를 다녀온 근간이 되었다. 세계 일주를 했다고 해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건 아니지만, 최소한 선입견으로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 훈련은 된 것 같다.
각설하고, “사람은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성향이 있다”는 책의 언급대로 작금의 세계는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여러 엉터리 일반화로 인한 고정관념이 여전히 공고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령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라든지, ‘중동 지역과 무슬림(중동 전체를 무슬림으로, 반대로 무슬림 거주 지역을 중동으로 범주화시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범주는 필요하다. 일반화 본능을 통해 때론 불필요한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범주를 여러 단계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동안 종교 혹은 지역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다를 거라고 배워왔고, 또 본능적으로 대해왔다. 그러나 문화적인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실상은 ‘삶의 단계(질)’에 따라 생활 방식이 정해진다. 가령 슬레이트 지붕은 2단계 주거 형태(1-4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단계가 높을수록 삶의 질이 좋음)로 아시아의 필리핀과 남미의 콜롬비아,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4단계 안락한 침실 형태는 한국이나 스웨덴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파키스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글이나 SNS 등은 4단계 형태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면서 그 외 단계는 그리 행복하지 않으며, 때론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라는 인식을 심어주곤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반화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내 범주에 의문을 품으라”라고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내부의 차이점과 집단 유사점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모습만 보고 집단 전체를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래서 종교는…”, “여당(야당) 지지자들의 문제는…”, “특정 지역 사람들은…”의 이야기는 생산적이지도 않고, 갈등과 반목만 심화시킬 뿐이다. 마치 휴전선과 주한 미군 부대만 인식하며 대한민국 전체를 위험 국가로 분류해 인식하는 경우와 같다. 실상은 심야에 통행이 자유로운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 안전한 나라인데 말이다.
‘다수에 주의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수는 51% 일 수도, 99% 일 수도 있다. “다수의 여성이 원할 때 피임한다”라는 말은 중국과 프랑스의 96%, 앙골라의 63%의 차이를 적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메이저리티 주도의 해석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한 이유다. ‘예외 사례에 주의하라’와 ‘나는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라’ 역시 일반화 본능을 억제할 때 필요한 기제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화학 물질이 모두 위험한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는 항상 더운 것이 아니다. 후자는 아프리카 여행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아프리카에서는 특정할 수 없는 흔한 경우들에서 아기보다 엄마가 먼저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래야 아기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주는 판단을 용이하게도 하지만 어떤 경우 오판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니 일반화 시각을 지닌 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현명한 해결책을 위한 겸손한 태도와 호기심으로 항상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범주를 절대화시킨 ‘단정’과 ‘단언’은 때론 불필요하고, 끔찍한 희생을 낳기도 한다.
[7장: 운명 본능, The Destiny Instinct]
타고난 특성이 그 집단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까? 일견 그래 보이지만 세상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운명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여전히 도처에 깔려 있다. 집단을 결속하고, 다른 집단에 비해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럽은 아프리카보다 우월하다’라는 말은 계속해서 그렇기를 바라는 심리가 기저에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결코 영원토록 가난할 운명이 아니다! 케냐, 르완다를 포함 몇몇 도시에는 24시간 내내 불을 밝히는 마트가 있고, 아프리카 전역에 무선 인터넷이 발전하고 있으며, 탄자니아, 케냐, 이집트, 모로코 등의 관광자원은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아프리카는 계속 가난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적어도 지중해를 끼고 도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리비아, 이집트(내가 예상한 남아공, 케냐, 탄자니아가 빠졌다!)의 기대 수명은 세계 평균인 72세보다 높다. 학창 시절 공부는 뒷전인 운동선수가 운동을 그만두게 되면 공부로는 계속 밥벌이를 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질거란 편견은 옳은 걸까? 남들보다 천천히 변화를 시도할지언정 결코 그렇지 않다. ([인터뷰] 20세에 알파벳 익힌 야구선수, 사법시험 합격하기까지)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화가 느린 탓에 똑같이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바위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같은 모양으로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문화는 제자리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탈바꿈하며, 소멸하기도 한다.
운명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서 상기해야 할 것은 “더딘 변화도 변화”라는 사실이다.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 데바남피야 티샤(Devanampiya Tissa) 왕이 세계 최초로 자연보호구역을 공식적으로 지정한 이래 미세하지만 점진적으로 그 영역이 확장, 현재는 지표면의 15%가 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연간 변화가 0.X% 지만 계속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은 어떤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명이 살아갈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한 남자가 37년간 물을 주었고, 놀랍게도 이곳은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울창한 숲이 되었다. 더디게 보이는 변화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환경의 거대한 전환을 맞이한 것이다. (관련 영상: 매일 사막에 나무를 심은 남자. 37년 뒤 나타난 놀라운 변화)
그러니 운명론에 속박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유통기한이 없는 지식은 한 번 배워두면 그 신선도가 영원히 유지되는 것도 있지만, 사회과학처럼 아주 빠르게 상하는 지식들도 있다. 정답이 바뀌었거나 혹은 사회가 바뀌어 유효하지 않은 답들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의 문화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변화한다. 예전에 내세우던 기치가 어느 순간 퇴색됐거나 반전이 된 사례는 숱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이 대두되고, 보다 업데이트된 정보로서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 어제의 문화가 내일의 문화를 담보해주지 않는 시대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비전이나 사명 등의 추상적인 단어가 오글거린다고도 하는 의견이 있지만, 삶의 점진적 개선을 위해서는 누구나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운명 본능대로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권리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남의 권리를 강탈하는 강도나 다름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각자의 사회적 위치와 책임에 맞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에 맞춰 개인이 공정한 기회 가운데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그 열매를 정직하게 취하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사회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8장: 단일 관점 본능, The single Perspective Instinct]
개인적으로 여당 편도, 야당 편도 아니다. 정치는 물론 언론에 대한 신뢰도 많이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분별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내 경우, 지금까지 단일 관점으로 지지하고, 비판 없이 수용한 결과는 그리 흡족하지 못했다. 단순한 생각 즉 ‘단일 관점 본능’은 저자가 언급한 대로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한다거나 안다는 느낌을 즐기게 되고, 다른 많은 것의 훌륭한 해결책이 된다는 느낌까지 매끄럽게 쭉 이어지기 쉽다”는 매력이 있다. 그러면서 관점에 맞지 않는 정보를 취하며, 세상에 대해 완벽하게 오해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특정 정당이나 언론, 더 나아가 한 가지 관점으로만 대상을 보지 않게 되었다.
단일 관점 본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 “아이한테 망치를 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에 덧대, “가치 있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은 그 전문성을 활용할 곳을 찾고 싶어 한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은 없음을 한스 로슬링은 주장한다. 수치는 단일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특정 구간을 끊어 놓고 통계를 보거나 특정 주제만을 선별해 통계를 해석하는 경우, 상황에 올바른 접근을 하지 못할뿐더러 엉뚱한 해결책이 제시된다. 의료 쪽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빈곤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1단계 지역에서는 고가의 치료 장비보다 환자를 병원까지 빨리 운송할 수 있는 교통 시스템이 효율적인 치료의 발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경제, 사회 발전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는 한 가지 이론으로 단정할 수 없다. 경제성장과 다른 산업 발전에 순수한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 가령 ‘요람에서 무덤까지’ 높은 복지 수준으로 알려진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사회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2012-2016년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10곳 중 9곳이 민주주의 수준이 낮았고, 산유국도 아닌 우리나라 역시 경제발전은 군부 독재 하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경제규모로는 세계 10위권 내에 있는 우리나라지만 OECD 37개국 회원 중에 행복지수는 고작 35위일 뿐이다. 국가 발전을 행복지수와 연관시키게 되면 한국은 정서적으로 그리 좋은 사회는 아닌 것이다. 결국 책에서 반복되다시피 세계는 수치 없이 이해할 수도, 수치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이러한 한 가지 수치나 관점만으로 이해하려는 단일 관점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저자는 망치가 아닌 연장 통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이 우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를 수집하지 말고, 분야를 넘어선 전문성을 주장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즉 내가 가진 전문성이나 좋아하는 생각이 망치라면, 드라이버나 스패너 또는 줄자를 가진 동료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됐을 때 유토피아적 시각으로 끔찍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자기 계발 메시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한스 로슬링은 오히려 복잡함을 끌어안을 것을 주문하고 있고, 그것이 보다 다각적으로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열쇠가 됨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