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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Jun 10. 2021

수채화 같은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워질 때

[낭만 그리스도인 #17]

  아, 이것 참 곤란하네.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음이 번잡할 때 가끔 옛 기억들을 끄집어내곤 한다. 건조한 일상에, 무기력함이 찾아들면 한 번씩 꺼내보는 영화며 책 그리고 노래는 나를 그 시절로 데려가 그때 그 선연했던 감정을 꺼내 보여 준다. 마이너풍 발라드만 그런 줄 알았던 신승훈의 노래는 메이저 코드로 진행해도 왜 그리 슬펐는지(7집 ‘가잖아’), 해묵은 ‘클리셰’가 되레 천재적인 ‘시그니처’가 된 주성치 사단의 영화는 왜 또 그리 재밌으면서도 가슴 저리게 아련했는지, 서점에서 무심코 집어 든 <닥터 노먼 베쑨> 평전을 읽다가 삶의 의미를 고민하며 여러 날 동안 밤을 지새우고, 2000년 뉴 밀레니엄 시대에도 눈이 흩날리던 거리에서 흉금을 털어놓던 교회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캐럴송을 부르고 다녔으니 그때는 혼돈 속에서도 나름 낭만이 있는 시절이었다.   


  점심을 먹다 살짝 식곤증을 동반한 무료함이 밀려왔다. 별생각 없이 잠깐 머리 좀 식힌 후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려는 때, 순간 모니터 화면에 뜬 익숙한 썸네일을 클릭하고 말았다. 실수였다. 아차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신비 속에 뒤로 가기를 누를 수 없었다. 이미 주인공 매력에 홀딱 반해 이상형인 지금의 아내와도 다시 보기로 함께 본 영화, 볼 때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감정을 달래느라 혼났던 영화, 그때의 나만큼 나이를 먹은 지금 청춘들에게도 사랑에 관한 애틋한 감정이 필요할 때 반드시 권유하는 영화,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N번째 <클래식>을 보고 있었다.      



  어쩜 이리 어김이 없을까. 영화 속 청순·상큼한 손예진을 보면서 느끼는 옅은 떨림은 아름다움에 관한 내 감정이 아직 건조해지지 않았다고 속삭인다. ‘그녀의 눈에 우주가 담겼다’는 어떤 이의 표현처럼, ‘우는 모습에서도 예쁨이 보인다’는 유튜브의 댓글처럼 남자들에게는 ‘클래식의 손예진’이야말로 언젠가 어린 시절 나를 미소 짓게 한 첫사랑의 표상이지 않을까. ‘주희(엄마)’ 그리고 ‘지혜(딸)’가 만들어가는 액자식 구성의 멜로 영화는 제목 그대로 <클래식>한 러브스토리를 보여 주며, 감정선을 툭툭 건드리는 탁월한 서사를 그려 낸다. 그런데 그 서사를 따라갈 때마다 그 시절(지혜의 시간) 방황했던 내 청춘이 떠오른다. 비록 지질한 역사로 점철되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었던 서툰 젊음의 행진이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잘하고 있는 걸까. 그때 꿈꾸던 청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문득 수채화 같은 아날로그 감성이 생각날 때가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시간들은 내 생애 가장 계산 없이 빛났던 순수함이기에 언제나 그리움 투성이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내게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며 마치 조던 피터슨처럼 일침을 가한다. 추억이 아름다우려면 지금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클래식>은 내게 그런 영화다. 그리움으로 훅 당겼다가 혹독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잠시 감상에 빠졌으니, 이제 다시 ‘지금, 여기’에서 내게 향하는 모든 도전들에 응전할 차례다. 그때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스무 살의 나에게도 부끄럽지 않지 않겠는가. 이제 다시 책을 편다. 펴기 전에! <시월애> 딱 한 편만 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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