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진실' 上
[M_Book #28-1] '만들어진 진실' 上
서론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다. 인터넷의 보급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났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어디에서든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정보를 더욱 많이 접하는 시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그 정보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교육에서는 비판적 관점으로 정보를 분석하라고 외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방식과 합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이를 적용하지 않고, 반대로 자신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정보에 대해서만 부정적 시각을 강화하는 데에만 힘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입장을 고려해보는 사람은 적어지고 서로에 대해 배타적이 되며, 이러한 서로의 태도가 결국 혐오를 만연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실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진실에 대해 유연하게 다가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처음엔 세상 모든 진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본론 1; 진실과 사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의문이었던 부분. 진실과 사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진실은 사실 중 참된 사실을 의미하며, 진실이 아닌 사실은 거짓 사실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좀 의외였는데, 사실(Fact)라고 한다면 무조건 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진실과는 다르게, 맥락과 관계없이 발생한 사건 그 장면에 대해서만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 이 사실을 진실에 비추어봤을 때 거짓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다.’라고 하는 문장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 정부를 향해 테러를 감행했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으니까. 하지만 맥락을 부여하게 되면 저 문장은 사실이 아니게 된다. 불평등 조약 등을 통해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나라를 되찾아오고자 했다는 의도와 사건 배경 등이 들어가게 되면 안중근 의사를 단순히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의도와 맥락을 부여하고 나서 다루는 사건을 진실이라 칭하고,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한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총체적인 관점을 형성해야 한다. 즉, 진실은 총체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진실은 과연 하나일 수 있을까? 사람은 자신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사고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며, 결국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더라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르게 형성된다. 이를 책에서는 경합하는 진실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경합하는 진실은 어느 곳에서나 만들어질 수 있으며, 우리는 그 넘쳐나는 진실들 사이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합당한 진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경합하는 진실이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그중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면, 왜 굳이 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분석해야만 할까? 책에서도 소개하지만, 이는 오도자 때문이다. 오도자는 교묘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진실을 왜곡하여 제시한다. 앞서 언급했듯 현시대는 개인이 정보에 너무나도 쉽게 노출되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오도자의 행동은 군중심리를 비롯해 많은 사회적 현상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게 만들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본론 2; 책에서 소개하는 만들어진 진실
책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 복잡성, 역사, 맥락, 통계, 스토리, 도덕성, 바람직함, 가치 등과 같은 분류 체계 아래에서 실례와 함께 보여준다. 그중 제일 와닿았던 것은 통계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숫자는 객관적일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맞는 말이다. 숫자 자체는 거짓말을 못하며, 조작하지 않는 이상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숫자 주변의 맥락을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숫자(통계)가 가지는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학부생 시절에 생물통계학을 배우면서 동일한 자료를 가지고 통계 처리를 한다 하더라도, 통계 처리 과정을 어떻게 변환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쉽게도 통계 처리 과정에 어떤 것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그 수업을 통해서 통계 자료는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후로 어떤 통계 자료를 볼 때,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조금 자극적인 주제일 수 있으나, 예전에 부모가 친자확인을 할 때, 10명 중 3명은 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30%에 달하는 이 숫자에 좀 황당했었다. 그러면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자녀도 친자녀가 아닐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닌가 하는 논리적 비약까지 갔었던 것 같다. 근데 잠시 차분히 생각해 보니,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친자확인을 한다는 것은 이미 이 아이가 친자가 아닐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아이의 외모가 부모와 닮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임신 시기와 성관계 시기가 맞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친자확인을 한다는 것은 이미 의심할만한 충분한 증거가 모인 상태에서 진행이 된다는 것이고, 이는 오히려 30%라고 하는 숫자가 생각보다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즉, 통계를 분석하고 내 삶에 적용하려 할 때는 통계 자료가 어떤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표본 집단의 크기는 모집단을 충분히 대표할 만큼 큰지, 표본 집단은 모집단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을 만큼 무작위성을 지니고 있는지 등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즉, 속지 않으려면, 나 자신이 휩쓸려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정보를 의심하고 판별해야만 한다.
본론 3;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나는 만들어진 진실
우리의 삶 속에는 만들어진 진실이 없을까? 거창하게 사회 현상을 분석할 것도 없이, 가장 가깝게 자기 합리화가 만들어진 진실이기도 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최선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갖가지 이유를 붙인다. 자신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정당한 이유가 처음부터 존재했었을 수도 있겠으나, 내 경우를 비추어보면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 문제 발생의 당위성을 부여할 때가 대부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가치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실은 옳지 못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책의 저자는 거창한 사회적 흐름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오도자를 비판하고 있다. 오도자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조정하려고 드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교육 등을 통한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어떤가? 책에서도 등장했지만 바람직하다는 것, 옳다는 것, 가치가 있는 것, 도덕 등은 문화마다 다르다. 그리고 때때로 자신의 문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맥락을 구성하여 교육으로 아이들에게 제공하고, 이런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그 문화가 정당한 것이라 믿게 된다.
이런 사회화 과정은 비판받아야 하는가, 비판받지 말아야 하는가? 오도자는 개인이고 사회는 단체이기 때문에 입장을 다르게 보아야 하는가? 개인의 존속을 위해 진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과 사회의 존속을 위해 진실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지만 결국 하고 싶은 질문은 하나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오도자를 특별하게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할수록 사실 답을 모르겠다. 오도자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오도자를 특별히 나쁘게 판단할 정당한 근거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본론 4; 기독교와 관련된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영어로 Truth다. 진리도 영어로 Truth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다루는 진리 또한 세상 속에서는 그저 경합하는 진실 중 하나라는 말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이 유일한 진리이며, 그에 반하는 것들은 거짓으로 치부하고자 노력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일전에도 말했듯이 그런 노력이 어떤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가진 진리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때때로 이단과 같은 이들로 인해 건실했던 기독교인이 시험에 들거나, 기독교가 아닌 이들이 기독교를 오해하는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내용이 진리라고 하여, 다른 학문을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의 논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펼칠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며, 아담의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져 버린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여 성화되기 위해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귀를 닫은 사람에게 이 말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가끔 지하철에서 전도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마주친다. 빨간색 글씨로 쓰여 있는 예수천국/불신지옥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하시는 분들. 그분들의 전도 활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지만, 수많은 진실이 경합하는 이 시대상 아래에서 그런 메시지가 과연 어떻게 사람들에게 다가갈지 생각해 본다면 조금 회의적이 되곤 한다. 교육을 통해, 지식의 범람을 통해 많은 것을 듣고 자란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메시지는 체감되지 않을뿐더러 기독교의 메시지를 부정할 만큼의 지적 자신감에 근거하여 귀를 닫게 만들지 않을까 한다.
이뿐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진실은 갈린다. 같은 성경을 근거하여 만들어진 종교이지만 천주교와 개신교는 그 교리를 달리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 어느 것이 타당한가? 어느 것을 선택하고 어느 것을 부정해야 하는가? 난 개신교 안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 함부로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서로 틀렸다고 주장하지만 말고, 서로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좇아 살아가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귀를 열어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안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로 갈리는 것뿐 아니라, 개신교도 교파에 따라 또 진실이 달라진다. 그래서 때때로 목사님들끼리의 디스전이 펼쳐지고는 한다. 그런데, 대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무슨 덕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될까?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자신을 세워나가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습 가운데 파생되는 분노와 분열과 갈등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때때로 시험에 들게까지 한다. 조금 더 여유롭게, 자신의 진실에 자신감을 가지고 상대방을 안아주고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결론; 나는 어떻게 갈 것인가?
이쯤 되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이 사회가 때때로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한다. 결국 경합하는 진실은 모두에게 옳다고 판단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경합하는 진실 가운데에서, 그나마 진실이라고 판단할 것들을 모아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인데, 진실이라고 판단할 기준을 먼저 세워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기준이 모여 내 정체성을 이뤄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바람직한 교사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지혜로운 어른인가?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겠지만, 현재 내가 원하는 정체성은 선을 이루는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감히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1순위가 아닌 것에 대해 아쉽기는 하지만, 내가 바라는 선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니 조금은 위안을 빌어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진실을 선택하는 과정은 끊임없이 혼란스러울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쌓여 어느 순간에는, 삶과 선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을 꿈꿔 본다.
p.s - 독서모임 멤버 중 한 명의 서평을 허락 하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