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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라, 물어보라, 요구하라"

'만들어진 진실' 下

by 시크seek

[M_Book #28-2] '만들어진 진실' 下

SE-a837bfb4-b224-4bbb-9c16-5e7f54f9a1d5.png 크리스천 독서모임 <하늘이음 3기>; 만들어진 진실 下 (3-4부)


단어, 사회적 산물, 이름, 예측, 신념. 다섯 가지의 분류 기준을 중심으로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해체해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손길에 따라, 당연시 여겼던 것들에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저것은 진실일까?’라는 순수한 질문 아래에서 우리를 싸고 있던 가치 체계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의심하고 묻고 요구함으로써 우리의 중심을 제대로 세워나갈 때임을 다짐해 나간다. 1, 2부에서도 언급했지만, 결국 경합하는 진실 중 어느 진실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단어를 고르는 것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상황에 적절한 단어가 없을지 생각해봤으며, 어떤 단어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읽힐지 고민해봤다. 아마, 교사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쯤부터가 아닐까 싶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이들은 교사의 언행을 보고 느끼고 배우니까. 책에서도 언급했듯,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는 우리의 삶에 제법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쥐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쥐, 생쥐, 쥐새끼, 설치류, 서생원 등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달라지고, 이에 따라 우리의 행동도 달라진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단어를 가장 세밀하게 사용하는 곳이 마케팅과 언론, 정치가 아닐까 한다.


마케팅은 자신의 가치나 제품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움직여야 한다. 언론은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해야 하지만, 사실 자본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 용어를 선택한다. 정치도 자신의 사회적 당위성과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을만한 단어를 세밀하게 고른다. 세 영역 다 때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자극시키거나, 사람들이 추구할만한 쾌락적 요소를 부각하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을 움직인다.


아마 그들의 말에 거짓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된 존재로서, 그들의 말을 한 걸음 멀리 서서 지켜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무도 많은 것을 허비해버렸다고 한탄하는 때가 올지도 모르니까.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나 맹목적으로 사는 것은 지적 편안함을 제공해 줄지는 모르나, 언젠가 가치관이 바뀌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을 때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허망함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요즘 ‘혐오’라는 표현이 사회에 넘쳐난다.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개인적으로 혐오라는 표현은 좀 더 자제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책에서는 언론에서 ‘기근’이라는 표현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는 장면이 나온다. ‘기근’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남발했다가는 ‘기근’이 가지는 위기감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혐오한다는 표현을 쉽게 하는 것 또한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다고 호도한다면 할 말은 없으나, 혐오는 단순히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무언가 싫어한다고 이야기할 때, 유희적으로라도 ‘ㅇㅇㅇ을 혐오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외치는 모습은 상당히 거북하기만 하다. 마치 난 1만큼 표현했는데 순식간에 100을 표현해버린 것만 같아서. 또한, 그 상황을 이용하는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아서. 같은 이치로 ‘혐오 표현’이라고 규정하는 행위도 굳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그런 시도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상황을 최소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던 단어에 ‘혐오 표현’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상황이 발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리 달갑게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만을 진리라고 여기며, 폭력성을 내포하는 언사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에 퍼져있는 페미니즘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페미니즘의 주된 움직임은 내 기준에서 상당히 폭력적이다. 이들은 합당한 이성을 가지고 상대방과 대화를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아가 자신이 현재 받고 있는 불이익과 같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분노를 토할 때가 많으며, 자신의 생각을 존중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다른 이들의 생각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겉으로는 여성의 권리 증진을 바탕으로 한 양성 평등을 이야기 하지만, 남성의 권리를 훼손시켜 양성 평등을 맞추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 또한 심심치 않게 바라볼 수 있는데, 온건한 페미니즘을 향해 ‘오빠들을 위한 페미니즘’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모습도 보았다. 지금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면, ‘오빠들을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사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상대측에 부정적 이름을 씌운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우리 함께 잘 살자.’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되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과학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언가 더 특별한 분자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그저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한 일원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이 있다고 믿으며, 인권을 위해 싸워나간다. 그렇다면 인권은 과연 언제부터 유래했는가? 세계 대전 이전만 해도 여성의 참정권은 전무했으며, 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이들은 작은 어른으로 취급되며, 하루에 14시간 이상 중노동을 했다.


지금의 인권은 어떤가? 교사로서 인권을 생각하면 ‘학생 인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기는커녕 체벌도 금지되었다. 인권에 대한 범위가 이렇게 바뀌어가는 것은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되어가기 때문이며, 결국 인권은 본래 절대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사회적 산물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권을 보장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에 와서는 아마 국가와 법이 아닐까 싶다. 국가는 법을 통해 자국민들의 인권을 책임지고 그 안전을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이로서 우리의 인권은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법에 의해 때로는 우리의 인권이 침해받기도 한다. CCTV를 통해 내 행적이 관찰되기도 하고, 최근 코로나로 인해 누군가의 불륜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개인의 인권과 공공의 이익을 비교하고자 할 때, 개인의 인권은 때때로 너무도 쉽게 무시되어 버린다. 또한 국가와 법이 보장해주는 인권은 자국민이 아닌 이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될까? 예를 들어,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의 인권은 누가 보장해줄 수 있는가? 도덕성 등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들도 인권을 보장해줘야만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인권을 우리가 왜 보장해주어야 하는가?


물론 나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인권을 당연하게 보장해 줄 근거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사람’ 자체가 귀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난민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자체가 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개인적으로 그에 대한 답은 종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각 종교는 사람을 다른 것과는 다른 특수한 존재로 설정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경우,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이름 붙이고 다스리게 할 특권을 준 존재로 인간이 드러난다. 무신론자들은 이 주제를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다.


Check your privilege; 너는 소수 집단이 아니니 입 다물고 있으라. 책에서 중간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참 무례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다양성에 대해 주목받는 시대이다 보니, 소수 집단의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그동안 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내고, 사람에게 동조를 얻으면서 흥분에 찰 수 있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일한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위에서 이야기한 극단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폭력성을 내포한 비아냥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그런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너는 해당자가 아니니까 빠지라고. 어째서 해당자가 아니면 배척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한다. 물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있지만, 실제 그 일이 발생할지는 결국은 미래에 당도해야만 알 수 있다. 막말로 내일 아침 내가 살아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조차 보장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내일이 보장된 것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미래를 위한 오늘의 헌신을 인내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때로는 찬란하게도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내일은 보장된 것이 아니다. 책에서도 언급했듯, 그렇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도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기초로 어떻게 그 많은 에너지, 투자와 헌신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지금은 많이 시들었지만 'YOLO(You Only Live Once)'가 유행했던 때가 있다. 나중을 알 수 없으니 지금을 살라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과하게는 탕진잼을 유발하게 만드는 기조였다. 어쩌면 이게 우리의 삶의 단락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개미처럼 일하다가, 어느 순간 내일이 보장되지 않음을 생각하고 자신을 위한 소비를 즐긴다. 하지만 소비 끝에 다시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일하던 자리로 돌아와 내일을 준비해 나가는 삶의 반복. 결국 이 순환 속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이 또한 답이 없으니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다만, 현재를 살기 위해서는 소비하는 삶뿐 아니라 존재하는 삶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책에서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에 대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구분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다. 얼마 전에 학생들과 인공지능이 만연한 미래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같은 질문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① 인공지능이 발달하여 자체적인 감각기관이 생기고, 자아도 생성되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 마땅한 독립적인 권리를 부여해주어야 하는가?

② 사람의 의식을 데이터화해서 기계에 넣었다면, 그 존재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또한 인권을 보장해주어야 하는가?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나, 쉽게 답할 수도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언젠가는 답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


『사람들 개개인은 알 수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확신이 있는 집단 속에 오랫동안 살다 보면 집단의 진실이 곧 나의 진실이 된다.』


책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모태신앙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주변에 개신교에 확신이 있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성장하다 보니 어느 순간 집단의 진실이 곧 나의 진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 믿음은 정말 순전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신기한 것은 이에 대한 것도 성경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인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성경에는 태어날 때부터 거부감 없이 신앙을 키워온 사람이 있었고, 사도 바울과 같이 뜨거운 영접을 통하여 옛것을 버리고 신앙을 키워나간 사람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 둘의 신앙 모두 좋은 신앙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때로는 시험에 들게 하는 단초가 될지도 모르나, 한편으로는 건강한 신앙의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나는 맹목적인 것보다는 의심하고 묻고 요구하는 신앙이 건강한 신앙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귀를 열어두기를 바란다. 세상의 의심을 통해 담금질될 수 있도록. 그 처절한 물음과 몸부림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아래는 2018. 1. 19에 임용고시 수험생 카페에 작성했던 글이다. 당시 카페에서 페미니즘을 공교육 내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여론이 갑작스럽게 확산되었고, 이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의 치열한 대립이 이틀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진 후 이 사태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남겨놓은 글이며, 책의 흐름과 맥이 유사한 부분이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1. '이름'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이름 안에는 대상에 대한 속성과 기능, 본질, 사회적 가치, 사회적 이미지, 관습, 문화 등이 집약되어 있고 그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안의 여러 부서 중 하나인 교육연구부는 그 이름에 나타나듯이 학생들의 학습이 원활하기 위한 교육 상황이 충실하게 일어나기 위하여 어떠한 교육이 어떤 과정과 방법을 거쳐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여러 담론들을 중심으로 기능하며, 사회적으로도 그런 기능에 대한 기대를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제 열정적으로 의견을 교환한, 공교육 안에서 차별에 대한 교육을 해나갈 때, '페미니즘 교육'과 '양성평등 교육'에 대한 이름도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것이 받는 사회적 기대와 이미지, 교육 과정 등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입니다. 무언가를 나타내고 대표하는 이름이란, 분명한 무게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 영향력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것에는 이름을 정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져야만 합니다. 그 내용과 본질이 어디에서 출발했든지 상관없이, 이름에 의해서 내용과 본질이 변질될 위험이 있으니까요.


2. 공교육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사교육에서는 특수하거나 지엽적인 영역에 대하여 교육하는 것이 자유롭지만, 적어도 공교육에 와서는 반드시 학생들에게 최대한으로 다양한 사례와 상황을 제시해주어야만 합니다. 이는 학생에게 자유로운 선택권과 주체적인 책무성을 부여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다 넓고 유연한 사고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는 한 주제에 대하여 찬반을 나누어 토론을 시키더라도, 때때로 서로의 입장을 바꿔 토론하게 만들 필요도 있습니다. 서울시 교육청의 2차 면접에서 하는 '추가 질문'이 그런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겠죠.


무언가 말이 길어졌지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공교육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주제에 대해서 가르칠 때, 그 반대 의견에 대해서도 충분히 사고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정보를 학생들에게 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교육 시간에 제한이 있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을 교사가 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공교육의 이상적 목표를 말할 때는 이런 부분이 포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공교육에서 지엽적 교육은 최대한 지양해야만 합니다.


3. 자기 가치관에 대한 믿음


우리는 모두 믿음 위에 살아갑니다. 이는 비단 종교의 영역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가치관, 이념 등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본 것들, 들은 것들, 경험한 것들, 배운 것들 등을 통하여 우리는 내면 속에 자신의 가치관이 옳다는 믿음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나와는 다른 믿음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해나가게 되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그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상관없지만, 그 방향성이 크게 다를 경우에는 참 많은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만 하는 것은, 내 가치관과 의견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것처럼, 자신의 의견 또한 정답은 아닙니다. 그냥 다양성이 공존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존 가운데에서 좀 더 설득력 있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시대의 주류를 형성합니다.


제가 이에 대한 글을 적는 것은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가치관과 믿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할 때는 굳이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 둘, 셋의 이야기들이 모여 점층적인 변화를 만들어갑니다. 지금 당장 상대방의 의견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는 조급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 내용이 소중한 가치를 분명히 가지고 있고, 명료한 필요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 빛은 언젠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4. 교사가 한 속성의 커뮤니티에만 머물러 있는 것


우리는 학생들에게 보다 넓은 사고를 이루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학생들이 그런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는 교사부터 그런 태도를 가지고 가야겠죠. 그렇기에 저는, 하나의 커뮤니티에 머물면서 자신의 관점을 형성해나가는 것을 지양하는 편입니다.


커뮤니티는 기본적으로 목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목을 위해서든,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든,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든 그 목적성을 은근하게, 혹은 뚜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난 커뮤니티는 그런 목적성 아래 자신들의 문화와 관습을 형성하게 되고, 자정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커뮤니티의 경우 상당히 배타적인 가치관과 의사소통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의 구성원은 자신도 모른 채, 그 문화와 가치관에 조금씩 물들기 마련입니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국에 살면서 한국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것처럼요.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만, 적어도 교사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 속성의 커뮤니티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여초든 남초든 상관없이요. 한 커뮤니티 안에서만 정보를 얻고 사고를 형성한다면, 상당히 배타적인 태도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라면 이런 태도를 지양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5. 토론이나 토의에서는 감정적이나 비아냥 등의 행동을 지양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이나 토의의 첫 번째 목적은 다른 사람을 이기거나 무너뜨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의 의견 차가 끝내 좁혀지지 않더라도, 보다 나은 결론을 내기 위해서 사고의 스파크와 유연성,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 첫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특히 토론이나 토의에는 '난 맞고 넌 틀렸다'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자원의 한계로 인해 가치의 선택을 해야 하는데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한가?'의 개념을 다룰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 활동 안에서 감정적이거나 비아냥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 토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론 활동 안에서는 그저 개인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뿐입니다. 설득에 실패한다고 해서 훼손되어버릴 가치라면 애초에 토론의 장에 나타나지도 못하겠죠.


물론 때로는 감정에 호소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그 목적이 '상대를 이기고자 함'에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더불어 자신의 의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빌려 토론에 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서로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하고 개인의 사고를 넓히지도 못하고 변명과 모순을 양산할 위험이 있습니다. 솔직함을 가지고 임하는 것이 토론의 중요한 예의 중 하나입니다.


6. 우리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각자의 가치관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기서 행동은 거창하거나 커다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내 의견을 솔직히 말하기, 있는 자리에서 정정당당히 살아가기 등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창한 이념을 꿈꾸느라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를 삶 속에 녹여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자신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교사도 이에 포함이 되겠죠.


어찌 되었든 우리는 삶 안에서 일종의 자기 평가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아는 것과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최대한 일치할 때 그 사람의 삶은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러니 한 번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이전에 앞서서, 자기 삶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도 이에 대하여 잘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지만, 함께 노력해나간다면 좀 더 나은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우리는 참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참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틀 간의 과열된 의견 교환의 상황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참 오랜 시간 달려야만 했습니다. 학교와 학원, 입시, 취업 등에 대해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경쟁과 노오오오력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개인의 삶 속에서 개인이 감당하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특히나 우리 수험생들도 그렇죠.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계속해서 들어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삶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요.


저는 그렇기에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배려와 위로는 우리 사회 안에서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인격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아픔을 들어주는 것에 대하여 쉽사리 동조해주지 못하더라고, 그 사람을 존중해주기를 바랍니다. 힘든 사람에게 "너 왜 내 힘든 이야기를 이렇게도 안 들어줘?"라고 비판하는 것은 괜한 갈등만 나타낼 것이니까요. 참으로 아픈 세대입니다.


p.s - 독서모임 멤버 중 한 명의 서평을 허락 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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