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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성과 능동성. 생각뒤집기

수동성. 겪음. 견딤. 버티기.

by 윤대

서구 사회이론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파악해왔다. 그것은 활동적 남성을 모델로 한다. 하지 않는 것은 무시되거나, 존재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는 '하는 자(것)'들 뿐 아니라 '겪는 것(자)'들도 존재한다. 참는 자(것)들, 견디는 자(것)들, 묵묵히 흡수하고 감수하는 자(것)들이 거기에 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 심연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나 허무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무력감이다. 어떤 힘 앞에서 꼼짝할 수 없는 무능력, 생명이 나타나기 이전 격렬한 벼락들을 맞아가며 화학적으로 변화해가는 작용을 겪어야만 했던 원시 수프의 상태와 흡사한 어떤 순수 수동성, 그것이 우리의 핵심에 웅크리고 있다.


수동성이 능동성에 앞서머, 수동성이 능동성보다 언제나 더 심오하다.


수술대에 오르는 순간, 인간은 의료 시스템에 접속되고, 환원되고, 숫자가 되고,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독자성은 최대화된다. 그는 그 자신 외의 어떤 다른 것도 될 수 없는,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그 자신이 된다. 즉 자신의 생명(혹은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급진적 수동성이 활동성보다 개체의 유일성과 더 깊은 연관을 맺는다.

_김홍중_은둔기계_문학동네


수동성과 능동성. 우리는 능동성을 강조한다. "넌 왜 이렇게 수동적이니?" 이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나쁘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의 주체성 능동성 자유의지를 그렇기 신봉하며 살아왔다. 언제나 스스로의 주체가 되길 원했고 나아가 세상의 주체가 되길 원했다. 난 그렇게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람에게 시선을 보낸다.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헐뜯고 욕을 한다. 어쨌든 이 모든 반응은 능동성과 주체성이란 가치에 대한 인정을 전제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과 내가 살아오면서 주체성과 능동성을 십분 발휘했던 일들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저녁 메뉴를 뭐 먹을까? 정도 아닐까. '~~을 한다.'라는 문장이 아니라 '~~을 할 수밖에 없다.'라는 문장.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쓴다면 적어도 뒤 문장으로 쓰이는 순간들이 더 많지 않을까.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 역시 강조해야만 한다는 문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수동성에서 시작된 것 아닐까.


마케팅과 소비에서도 마찬가지. 소비의 동기조차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린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자크 라캉의 말. 애초에 능동성의 발현은 수동성에서 뿌리내린 것 아닐까.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광고에 뿌리내린지 오래다. 마이크로 타겟팅. 인간은 자주 능동성과 자아를 부정당한다. 수동성과 불가항력 역시 맞닿아있다. 운명이라 치부되는 사건 속에서 인간은 나아가는 배라기 보다 파도에 떠 밀리는 부표다. 침몰하지 않고 파도를 견뎌내는 부표다.


능동성, 주체성, 신화, 자의식 과잉을 덜어내기. 수동성, 견디기, 버티기. 존버. 감당하기를 더하기.


문장을 마주하고 난 다음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생각이 내지르듯 펼쳐진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만난다. 그리고 합쳐졌다. 바로 생일에서. 생일과 생일 축하에서. 탄생의 순간과 탄생을 축하하는 순간에서 둘은 만난다. '낳았다.'라는 능동문으로 표상되는 어머니의 능동성이 '낳음 당했다.'라는 수동문(피동문이란 표현이 맞지만)으로 표상되는 자식의 숙명적인 수동성과 만난다. 어머니와 자식은 태어난다고 고생했다는 말과 낳아주셔서 감사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 서로가 서로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고마워하고 축복한다. 인간의 시작점에서도 능동성과 수동성은 만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축하한다. 갑자기 생각이 생일로 내달린다. 엄마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과 생각이 만난다. 내 수동성을 축하해주는 어머니에게 감사를.


P.s 책 은둔기계_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사회학자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저자의 책. 4부의 목차. 하루 한 챕터. 월 화 수 목. 4일 동안 읽었다.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 이 문장 자체가 책이 된다면 이 책 아닐까. <책은 도끼다.>라는 박웅현 작가님의 책처럼 이 책은 그 자체로 도끼다. 책을 읽으며 밑줄 친 문장보다 밑줄 안친 문장을 고르는 게 더 쉬울 만큼 밑줄이 의미가 없었다. 오랜만에 도끼 같은 책을 만났다. 어쩌면 망치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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