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10분의 귀갓길. 짧은 시간과 익숙해진 공간. 익숙함과 새로움이란 양극의 탈을 쓴 자극이 내 눈과 내 귀로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일방적인 파도가 너무 거칠게 느껴질 때면(거의 매번이지만.) 방파제를 세우듯 보고 들을 것을 철저하게 엄선해서 향유한다. 귀에 꽂은 갤럭시 버즈에선 히게단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눈으로는 보도블록과 건너편 도로 행인과 마주 오는 사람을 번갈아가며 응시하다 정지하는 순간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렇게 귀갓길에서 내 나름대로 자극들을 컨트롤해본다.
하지만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자연현상이 있듯 방어가 불가능한 자극이 있다. 내게 방어 불능의 자극이 있음을 인지시켜주는 건 바로 담배연기다. 그 불쾌한 냄새가 내 코를 찌를 때면 그제서야 시각과 청각 외에 후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곤 직전까지 수행했던 의식적인 노력들과 그 결과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리고 오로지 후각 자극에 따른 반응만이 의식의 영역을 지배한다. 마치 담배연기가 방안을 보이지 않게 가득 채우듯. 그렇게 의식의 영역을 찬탈당하고 나면 귀갓길의 낭만적 서사는 없다. 그 길의 존재 목적에 부합하기 위한 빠른 걸음만이 있을 뿐. 그 냄새가 점거한 구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고. 이 사고와 행동은 어쩌면 길 자체의 한계이자 특징을 드러낸다. 길은 과정일 뿐. 목적지가 될 수 없다는 한계이자 특징. 결국 목표지점, 끝을 향한 빠른 걸음과 이탈은 길의 존재 목적에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담배 냄새는 나에게 지금 왜 이 길을 걷는지 그 이유를 불쾌감과 함께 상기시켜준다.
귀갓길의 나처럼 여러분들도 수없이 밀려오는 자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다음 보고 듣고 맡고 맛보다 다시 잠든다. 각각의 행위에 대응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은 인체 고유의 감각이자 우리가 세상을 마주하고 해석하는 도구들로 기능한다. 동시에 이 도구들은 때때로 주체인 내 의지와 무관해진다. 보고 싶지 않지만 보게 되고 듣고 싶지 않지만 듣게 되는 순간. 대상과 주체의 관계는 역전된다. 감각의 주체면서 감각의 대상이 되는 복합성. 이 복합성을 가장 생생히 체험하게 하는 감각이 바로 후각 아닐까?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악취. 계속 맡고 싶어도 금세 사라져 버리는 향기. 후각은 의지를 무력화시킨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모든 자극들을 완벽하게 차단할 순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자극이 없어도 우리는 머릿속에서 그 자극을 회상의 형태로 만들어 반응하기도 한다. 다만 차단을 하기 위한 노력. 최소한의 저항은 해볼 수 있다. 최소한의 저항은 때론 자기 위안을 넘어 더 큰 저항을 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 행위. 나아가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직시하기. 하지만 후각의 영역에선 그 저항이 쉽지 않다. 우리가 코를 막는 것은 이미 그 냄새가 인지되고 난 이후다. 사전 대비 마음의 준비 따윈 없다. 그게 가능한 것은 오직 시각과 청각이 동반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악취라고 예상되는 방귀'소리'. 냄새가 날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 이렇게 보고 들음이 동반될 때만 저항이 가능하다. 단독 저항은 불가능하다. 냄새는 나의 인지 범위,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그 너머에 존재하다가 느닷없이 내 인지 인식의 영역으로 파고든다. 아니면 투명 인간처럼 이미 그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영역으로 겁도 없이 다가간 걸지도 모르겠다. 담배 냄새의 침공이 아닌 나의 침공. 다만 침공했든 침공당했든 내 후각에 포착된 냄새는 잘 벼려진 칼날이요 목표물에 정확히 명중한 총탄이다. 날카롭고 강렬하게 찔리고 피격당한 나는 신음한다. 무력하게 패배하진 않았다는 항전의 제스처를 취할 수 없는 무력감. 이 순간 냄새는 그 무력감을 주는 공포이자 후각은 내 무력한 패배를 알리는 전령이다.
향기 혹은 악취를 맡았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어쩌면 자신의 모습도 괜찮다.후각의 반응은 솔직하다. 아니 솔직할 수 밖에 없다. 대비하고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튀어나오는' 우리의 모습을 솔직한 모습이라 한다면 시계(視界) 밖에서 찌르고 들어오는 냄새를 맡았을 때 우리의 모습 역시 솔직한 모습 아닌가. 좋은 향기를 맡으면 이미 지나간 그 향기의 꼬리라도 찾겠다는 듯 뒤돌아 본 경험. 반대로 미간을 찡그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린 경험. 덧붙여 혹여 나의 반응이 누군가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본능적 반사에 이은 인위적 사고로 찡그린 미간의 주름을 펴가며 짐짓 의연한 척 행동한 경험까지. 향기 혹은 악취라는 이분법적이고도 명확한 두 진영으로 귀결되지 않는 냄새. 판단을 하기위해 킁킁거리며 재차 맡았던 경험. 물음표를 불러오는 이 냄새가 악취로 귀결되는 공포일지 향기를 주는 호기심일지. 탐구하는 모습과도 비슷했던 그 순간의 모습은 솔직함을 넘어 순수함으로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1년 4월 6일 현재. 사람들이 가장 크게 잃어버린 자극 역시 후각이다. 마스크가 바이러스와 함께 향기도 막아버렸으니까. 좋은 향수 혹은 샴푸 냄새 섬유 유연제 냄새가 코를 침범하는 순간. 무슨 냄새일까? 궁금해하는 그 순간을 앗아가 버렸다. 마스크를 껴도 담배 냄새는 잘만 들어오던데. 조금 손해 보는 기분이 갑자기 든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보이지 않는 냄새. 비슷하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건지. 그 외에 냄새와 바이러스가 그 자체로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지. '담배 냄새 맡기 싫다.'라는 문장에서 시작된 글이 길어졌다. 이만 마친다.
P.s ::: 향으로 기억되기
누군가는 목소리고 기억되고
누군가는 얼굴로 기억되고
누군가는 냄새로 기억된다.
냄새가 향기인지 악취인지는 사실 별 중요치 않다.
그저 향기로 새겨진 사실만으로 그는 얼굴과 목소리를 넘어 불멸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냄새라는 자극으로 옛 기억을 소환하는 프루스트 현상은 비단 소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냄새로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난 어떤 냄새로 기억될까.
또다시 솟아오르는 물음표를 뒤로하고 마침표를 찍는다.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