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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장장이 휴 May 13. 2022

타고났지만, 빛나지 못한 우리의 재능에 대하여

우리가 타고난 재능은, 매우 강력하고 너무나 미미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제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조각가가 어떤 형상으로 빚기 위해서 원재료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 ...(중략)... 그러나 예술적인 유형의 활동뿐 아니라 나머지 모든 활동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타고나는 것은 능력일 뿐이다. 재료를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는 기술은 학습되고 열심히 연마되어야 한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깁스의 추억


  스물 한살 때였는지 스물 두살 때였는지 가물가물하다. 나는 깁스를 하고 한학기를 보냈다. 고향 친구가 기숙사에 놀러왔다. 기숙사에서 나와 1분 남짓 걸으면, 기숙사 삼거리라고 부르곤 하던 분기점 옆에 농구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체교과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둘과 2:2로 농구를 했다. 좀 격해져서 몸싸움도 하고 서로 씩씩거리기도 하며 오순도순 재밌게 했다.


  그런데 웬 걸, 다음날 일어나보니 손등이 두꺼비만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병원 가니 골절이라고 깁스를 하란다. 깁스를 했다. 오른손 깁스였다. 노트북으로 시험을 대체해줄 수 있는 수업 서너개를 빼곤 학기수업을 다 취소했다. 문제는 밥이었다. 왼손잡이지만 오른손으로 수저를 쓰며 살았다. 그래서 밥먹는 게 너무 힘들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은커녕 숟가락이 평행이 안 맞아서 국물이 입 가까이 오다가 질질 흘렀다.


  그런데 정확히 이틀 뒤에 나는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완벽한 정석대로. '정석 젓가락질'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X자 젓가락질'을 구사하는 바람에 콩을 잘 못 집어먹는 젓가락질 바보. 내가 그 바보였다. 오른손이 21년 동안 못해내던 걸 왼손은 이틀만에 해냈다. 나의 재능이 드디어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왼손, 아니 나의 재능은 가히 강력했다. 평생을 극복못한 젓가락질을 그리 순식간에 습득해버리다니. 김춘수 시인이 그랬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내 왼손이 딱 그랬다. 내가 그 녀석을 기용하자 그 녀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재능도 아마 내 왼손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 같은 건 없다


  나는 내담자 심리검사를 실시할 때, 항상 심리검사 구성에 TCI 검사를 포함시킨다. TCI 검사는 내담자가 타고난 것과 살면서 형성되었으나 마치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구분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TCI는 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의 약자다. 한국말로는 '기질 및 성격 검사'다. 4가지 '기질' 척도와 3가지 '성격' 척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기질'은 타고난 것, '성격'은 살면서 형성된 것이다. 타고난 건 애당초 내가 지니고 태어난 것이라 바꾸려면 매우 힘이 든다. 그러니 그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은 선택지다. 성격은 그 타고난 '기질'들을 가지고 세상과 상호작용해가면서 내게 형성된 것이다. 그러니 비교적 개선하거나 변화시킬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게 구분되어 검사결과지에 나오고,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해서 검사자는 내담자에게 해석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기질'이라는 게 통상적으로 말하는 소위 '타고난 성향'하고는 좀 다르다. 내담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 저는 원래 눈치를 좀 많이 보는 성격이어서요", "제가 원래 좀 욱하는 기질이 많아가지구요.", "제가 원래 어릴때부터 좀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거든요. 그냥 그렇게 타고난 거 같아요."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세상에 이런 건 없다. 우리가 타고나기를 눈치를 많이 보거나, 생각이 많은 건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절대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우리를 제작한다면, A는 좀 생각이 많은 스타일로 제작해서 내보내고, B는 눈치를 많이 보는 애로, C는 자주 욱하는 애로 제작하진 않는다는 이야기다. 대신에 이렇게 제작한다. A는 고통에 섬세한 기질로, B는 기쁨에 섬세한 기질로. 아, C는 좀 끈덕진 기질로. 제작세팅 완료. 엔터버튼 탁. 이런 식이다.


  즉, 기질은 통상적으로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특성들보다 훨씬 더 미시적인 차원에 해당한다.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는 구성단위 구조에 빗대어본다면, 기질은 '원자단위'에 가깝다. 따라서 원래 타고나기를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없지만, 원래 타고나기를 "불쾌한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우리는 이렇게 원자단위 수준의 기질을 몇 가지씩 가지고 태어난다. 이 원자들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 타고난 기질과 내가 처한 환경의 조합에 따라 다양한 성격들이 각자 형성되어간다.


  타고난 것은, 강력하다.


  세상 모든 것이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듯이, 이 타고난 '기질'들 또한 각각 장단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질들이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당신이 어떤 측면에서 재능을 타고났는지가 정해진다. 그리고 이 타고난 기질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어떤 환경에서도 태초에 주어진 특성 그대로 잘 유지된다는 점에서, 우리 각자가 타고난 '기질'은 매우 강력하다.

  

  사실은 미미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타고난 '기질', 타고난 '재능'은 태어날 때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채 죽을 때까지 어지간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원자단위의 씨앗일 뿐 나무도 열매도 아니다. 그래서 막상 나와 당신의 인생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한 경우가 많다. 아니, 그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걸 가장 잘 증명하는 증거는 바로 '평범한' 나와 당신이다. 타고난 재능들은 '평범하지' 않지만, 그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우리는 '평범하다'. 그 재능을 갈고닦아 세상에 내놓기 전까지는.


  갈고 닦아야 한다.


  내 왼손이 무언가를 잘 익히고 배우는 건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왼손잡이'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깁스 때문에 왼손을 연마(라기엔 이틀 젓가락질 시도한거지만...)하기 전에 내 젓가락질 재능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타고난 재능을 묵혀두지 마라. 갈고 닦으면, 분명 일취월장하는 순간들이 당신에게 큰 기쁨과 짜릿함을 선사할 것이다. 괴테의 말처럼, 우리는 원석을 지닌 채 태어났을 뿐이다. 그 원석을 다이아몬드로 빚어내는 건,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당신이 갈고 닦기로 마음 먹는다면, 그래서 당신의 삶에서 그 마음먹은 일을 실천한다면, 당신 안에 있는 재능은 상상 이상의 결과를 당신에게 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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