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고 Oct 05. 2022

언덕 위에 올라서서

ITALY_ROME

스페인 계단의 사람들.


-그레고리 팩과 오드리 헵번은 여기서 젤라또를 먹었단 말이지? 하지만 다들 맥주랑 물만 마시고 있는걸?


피렌체에서 로마에 도착한 첫날,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오늘도 무작정 걷는다. 다만 시간이 이미 저녁을 향해가니 대충만 둘러볼 요량으로 거리를 나섰다. 바티칸을 포기하면, 내가 볼 로마의 주요 관광 포인트는 대부분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해가 지는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져볼까? 다섯 시를 훌쩍 넘기 시간에도 40도에 가까운 로마지만 분수 옆에선 시원하겠지? 영화처럼 말랑말랑한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기대와 현실은 이렇게나 다른 법. 인파로 도저히 발 디딜 틈이 없던 트레비 분수는 눈도장만 찍은 채, 내일 다시 오자 기약한다.(물론 '내일' 다시 찾은 트레비엔 발 디딜 틈이 아니라 숨 쉴 틈도 없었다.)


트레비를 뒤로하고 도달한 곳은 스페인 계단. 인파가 못지않지만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다. 로마의 휴일에선 오드리 헵번이 스페인 계단을 폴짝거리며 젤라또를 먹던데, 지금 그랬다가는 인파에 밀려 지나가는 사람의 옷을 달콤하게 만들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젤라또는 보이지 않고 다들 계단에 모여 앉아 인파를 안주삼아 맥주와 물을 들이켠다.


어두워지기 전에 더 조금 더 걸어볼까? 계단 앞 광장에서 이어진 골목을 따라 발을 옮기니, 핀초언덕이 펼쳐지고, 여유로운 언덕 위 공원에 귀여운 아이스크림 트럭이 보인다. (유해진 배우가 출연하는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저 트럭이 나와 로마 첫날의 기억이 상기되었다.)


몇 분 전까진 분명 젤라또가 먹고 싶었는데, 더위에 조금 더 걸었다고 당분보다는 물이 시급하다. 많은 순간, 변덕의 이유는 대게 체력이다. 언덕 끝 난간에서 사람들을 비집고 사진을 몇 장 찍는다. 언덕 아래로 로마 시내가 펼쳐진다. 영국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이번 여행은 어쩐지 높은 곳에 올라 전경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나 관계 혹은 헤쳐가야 할 앞 날도, 이처럼 한눈에 내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한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답을 모르는 채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고 사는 것이 생의 가치라면 또 가치려나.


다시 스페인 계단으로 발을 옮긴다.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을 헤치고, 맨 위에서 잠시 멍하니 해가 기우는 순간을 관망한다. 사실 동인지 서인지 전망대의 향을 모르니 해가 지는 모습인지는 모르겠고, 그저 핑크빛에서 쪽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볼 뿐. 노을 지는 이탈리아의 스페인 계단에서, 들려오는 영어와 불어를 배경음 삼아 서있는 한국인이라니. 참으로 정체모를 다국적 모먼트다.




핀초언덕 위 아이스크림 트럭.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티브이 프로에서 다시 보고 반가웠다.
핀초언덕에서의 전경.


이전 09화 마음은 노를 저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