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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고 Oct 30. 2022

어쩐지 평온하다 했지

ITALY_ROMA, 이 나쁜 로마!

10...월? 10월? 10월? 10월?!!!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번쩍 드는 것 같던 정신이 카오스에 빠져든다. 아니 10월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부랴부랴 여권과 전화기를 들고 호텔 문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로마 떼르미니 역의 약국이 닫기까지 남은 시간 십오 분. 숙소에서 1킬로가 넘게 떨어져 있는 약국에, 이 느린 몸뚱이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오만가지의 새드 앤딩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된다. 




약 3주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아침 일찍 일어나 안티젠 테스트를 받으러 떼르미니 역의 약국으로 향한다. 여기서 코로나 양성이 나오면 열흘 간 귀국 금지, 비행기 표는 그대로 공중분해. 당장 내일 밤부터 지낼 숙소도 다시 구해야 한다. 비행기 값으로 날리게 될 돈만 해도 엄청날 텐데, 양성이라면 호스텔은 어림도 없이 열흘간 무조건 호텔 체류(감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라는 늪에 빠지게 된다. 예정된 출국일 바로 다음날부터 성수기에 돌입하는 탓에 엄청나게 뛰어버린 숙소 값을 감당할 수 있을지, 하지도 않는 도박판의 패를 쪼는 기분으로 결과지를 기다린다. 그러나 결과는 다행히 음성. 마스크 없이 자유로운 유럽에서 그래도 꼬박 마스크를 쓰고 호스텔 대신 저렴한 호텔을 찾으려 고생한 보람이 있다. 


마음 편히 마지막 로마를 즐겨볼까? 불타오르는 로마의 기온을 뚫고 마음만은 상쾌하게, 근처 관광지를 다시 돌아본다. 어제 못 본 판테온도 구경하고, 젤라또도 하나 먹어야지. 그래 나를 위해 산 기념품도 없으니 모카포트도 하나 사볼까. 저녁은 피자를 한 판 사서 호텔에서 샐러드랑 먹는 게 좋겠다. 이 정도면 글로 읽고 머리로 상상하던 영화 같은 여행은 아니었지만, 큰 탈 없이 뒤늦은 인생의 첫 여행을 마치겠구나! 생각하며 모카포트와 샐러드를 손에 들고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왔다. 


우선 짐부터 정리하자. 여권 지갑에 넣기 전 아까 받은 안티젠 검사표를 다시 펼쳐 보는데, 10월? 뭐가 10월이지? 눈앞이 깜깜해진다. 내 생일은 9월인데? 그리고 지금 시간은 약국 닫기 십오 분 전. 이탈리아에 지진이 났던가? 흔들리는 머릿속을 살필 틈도 없이 일단 소지품을 챙겨 떼르미니 역으로 달리고 본다. 이름과 여권번호, 결과만 확인하느라 생일을 살펴보지 못한 나를 원망한다. 그렇게 문을 닫기 5분 전 가까스로 도착한 검사소. 상황을 알고 보니 아래층에서 접수를 받았던 약사의 등록 실수였다. 검사지를 출력해주는 검사원의 표정에 당황함과 미안함이 스친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래 여행에서 이런 해프닝도 있어야 기억에 남지 여기서 화낼 필요가 무엇일까? 마음을 가라앉힌다. 애초에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내 잘못도 큰 것을. 웃으며 수정된 검사지를 들고 약국을 나선다. 그날 밤 녹초가 된 몸으로 호텔에서 피자와 미지근해진 샐러드를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이렇게 긴박한 여행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드디어 밝은 귀국일. 해프닝이 어제로 끝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탈리아는 참 고된 나라였다. 다빈치 공항 체크인 데스크에서 검사지를 제출하니 직원이 잠시 날 막아선다. 검사지는 영어로 표기되는 것이 원칙인데 'NEGATIVE'가 아닌 'NEGATIVO'로 작성되어 있다는 것. 영어 표기 원칙은 알고 있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한 모든 곳에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기에 문제가 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나 같은 단어잖아? 그럼 그곳에서 검사를 받은 모든 이들은 비행기 탑승이 금지된 건가? 이탈리아 승무원들이 모여 검사지를 보며 한참을 이야기한다. 한국인이라도 한 명 있다면 좋을 텐데. 어제 폐기된 새드 앤딩 시나리오가 다시 떠오른다. 그래도 코로나 문제는 아니니 호스텔을 구할 수는 있겠지? 망상이 화단 가득 꽃 피는 십 분여의 지나고, 다행히 의미를 인지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라 탑승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받는다. 아... 네 그렇군요. 그라찌에.


영국에서 이탈리아로 오는 날도 연착으로 마음고생이 컸는데, 가는 날까지 이탈리아의 기온처럼 화끈하다. 기억에는 오래 남겠군. 개발도상국도 아니고 오지도 아닌 유럽에서 30대 후반이 된 나도 이렇게 당황스러운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겨우 20대 초반에 다 한 번씩은 했다는 거지? 새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그래 어쩐지 영국에서 너무 평온하다 했지. 자유여행 코스가 너무 심심할까 봐, 이렇게 약간의 고난을 패키지로 선물 받는다. 그래도 무사히 스테이지 클리어. 아... 그나저나 한국 가기 정말 쉽지 않네. 


잘 봐 둬... 저녁에 다시 뛰어 들어가야 하는 문이다
심지어 내가 산 모델은 한국이 천 원 더 저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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