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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고 Oct 30. 2022

무사히 레이오버

서른일곱, 밀린 숙제를 끝내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


안전벨트를 조여매고 마음 편히 등을 뒤로 기댄다. 우웅 소리와 함께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가 로마 상공으로 떠오른다. 3주의 여행이 끝나고 드디어 오른 귀국 비행기. 호텔 창 틈으로 들어오는 '반짝'에서 '이글'로 변해가는 햇빛에 눈을 뜬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비행기에 앉아있다니. 어쩌면 나는 가만히 이 비행기에 앉아 영국과 이탈리아라는 영화를 본 것은 아닐까. 어제 벌어진 안티젠 검사지 생일 오류 사건과, 비행기 탑승 전 벌어진 안티젠 검사지 영문 표기 문제 덕에 마음이 탈탈 털렸더니, 모든 기억이 꿈처럼 아득하다.


그래도 나는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고, 두바이에서 비행기 환승만 제대로 한다면 서울로 돌아간다. 집에 가면 우선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지. 서른일곱 늦은 나이에 처음 떠나는 내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준 고마운 사람들. 떠나기 전 지인들이 건네준 말 한마디, 작은 팁 하나로 나의 여행은 내내 그 어떤 백그라운드와 가이드를 가진 것보다 든든했다. 너무 소박해 민망하지만 준비한 선물들이 캐리어에서 망가지면 안 될 텐데, 두바이에선 뭘 하면서 경유 시간을 보낼까 등의 생각으로 첫 귀국 비행을 시작한다. 당장 여섯 시간 뒤 일어날 일은 꿈에도 모르고.




한국으로 가는 경유지인 두바이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깜깜한 밤. 종일 먹은 것이라곤 비행 전 먹었던 젤라또 하나와 다섯 시간 전 반쯤 남긴 기내식뿐. 배가 고프지만 이 시간에 뭘 먹긴 부담이고 빨리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이상하게 내가 있는 주위의 카페는 모두 문을 닫았다. 로마에서부터 한 잔도 마시지 못해 커피가 간절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다른 방향으로 걸어, 드디어 발견한 커피 체인 쁘레따망제. 영국 이후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움이 두배다.


두바이 공항에서 만난 쁘레따망제. 생명수인 줄 알았던 사약.


갈증에 허덕이던 오지의 탐험가가 물을 마시듯 급하게 커피를 밀어 넣는다. 카페인이 혈중으로 퍼지며 마치 피로를 잡아먹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비행기에 탑승. 그러나 '자 날아가자 한국으로!'라는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치 급체를 한 듯, 참을 수 없는 두통과 울렁거림이 시작되었다. 빈속에 급히 마신 커피가 화근이었다.


당연히 모든 기내식은 스킵. 그래 조금 참으면 가라앉겠지, 자다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비웃으며 심해지는 통증과 울렁거림에 몸이 베베 꼬인다.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해도 나올 것이 없다. 그러나 빈 속을 게우는 흉내만 내더라도 그럴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하필이면 좌석도 복도가 아닌 중앙석. 심지어 야간비행인 탓에 옆자리에서 잠든 파키스탄 아저씨를 계속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심해지는 증상으로, 종교는 없지만 신이 있다면 차라리 이탈리아 길바닥에 눕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의 목적지는 아마 한국이 아닌 하늘 이미그레이션인 듯했다.


승무원에게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상태를 설명한다. 하지만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겨냥할 단어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승무원이 준 약을 먹어도 상황은 크게 좋아지지 않는다. 사전이라도 찾아 증상을 설명하고 싶은데 이코노미에는 와이파이가 지원되지 않는다. 유료 와이파이라도 잡고 싶은데 왜 오류까지 나는 것인가. 지금 와서 생각건대, 비행기에 뭐 얼마나 전문적인 약이 구비되어 있겠는가. 아마 어떤 단어로 설명했어도 그 약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국경을 넘으며 창 밖의 어둠은 서서히 밝아졌다. 분간할 수 없던 완전한 흑색의 하늘이 검푸르게 변하다 맑은 쪽빛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하늘색으로 제 빛을 찾아갔다. 약을 네 개쯤 먹었을 때, 내 몸의 고통도 어둠에서 밝음으로 서서히 옅어졌다. 고통의 하늘에서 무사히 현생으로 레이오버. 아직 무언가 먹거나 마시지는 못하지만, 랜딩 전까지 잠시 눈을 붙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몸과 정신이 돌아오니 헛웃음이 난다. 어쩐지 떠나기 전 쌓아둔 걱정이 무색히도 평탄하더라니, 이렇게 후반부에 보너스까지 적립해서 문제가 발생할 줄이야. 만약 마지막까지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이 여행을 어떻게 기억했을까? 아마 무사히 마친 여정에 나름 감사했겠지. 하지만 이 고생 덕분에 내겐 이렇게 남겨둘 에피소드가 또 하나 생겼다.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움과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에 좀 힘들었다고 칭얼거려 봐야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징그러운 어리광을 부리고픈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도착한 멀고 먼 한국. 옆자리의 파키스탄 아저씨가 몸은 어떻냐며 따뜻한 목소리로 묻는다. 비행도 힘들었을 텐데 나 때문에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답하니, 자신은 괜찮으니 빨리 나아지길 바란다며 어깨를 토닥여준다. 아... 이 여행, 마지막은 아픔인가 했는데 진짜 그 끝엔 따뜻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었네. 힘들었지만 고마운 엔딩이다.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 꺼낸 뒤늦은 여행이란 숙제에서, 나는 처음 생각했던 질문에 답을 얻었을까? 생각하면, 뭐든 한 번에 바뀔 수는 없는 거겠지. 다만 다음 걸음은 조금 덜 무서워할 수 있을 것 같다.


늘 비가 오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내내 화창하더니, 한국엔 비가 쏟아지는 중이다. 우산도 없지만 여행지에서 오는 것보단 훨씬 낫지. 내 캐리어는 방수일까? 일단 뛰자. 쏟아지는 비에 땅이 젖는다. 지난 3주의 시간이 비를 따라 흠뻑 기억을 적셨다.

   

비가 오는 한국. 가을까지 참 오래도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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