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 복수전공 처음으로 빛(光)을 발하다, LED FAE 엔지니어 직무
가족이 운영하는 기업에 학을 떼고, 코로나시절 그렇게 다시 고향집에 내려가게 되었다. 직장을 잃었으니 서울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영어과외를 뛰며 생활비를 벌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기상청 계약직 일을 하다가, 드디어 나의 이과 복수전공에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문과직무가 아닌 이과직무에서 연락이 왔다. 그간 줄곧 문과 기반의 직무만 하다가 처음으로 이과 전공을 살린 엔지니어 직무 제안을 받았다.
내 능력의 베이스는 중국어이기 때문에 대만에 본사를 두고 있는 외국계 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직무는 FAE 엔지니어라고 하던데, 처음에 연락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을 때 기상청 사람들은 축하해 주었다. 하, 이때 갑자기 무슨 일복이라도 터졌는지 나의 다섯 번째 반도체 회사에서도 동시에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그 회사는 비자가 허가 났어야 했는데, 그게 오래 걸려서 일단 여기 이 LED회사를 먼저 다녀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사실 이 회사를 "너무 힘들어서 퇴사했다"는 건 아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입사 타이밍의 엇갈림으로 한 달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2년 반 동안 보지 못했던 중국인 남자친구도 있었고, 결국엔 중국에 있는 반도체 회사 쪽이 내 상황과 더 맞는다고 판단했다. 취업은 참, 끝날 때까지 모른다. 지금도 그렇고, 그땐 더더욱.
반도체회사에서 조금만 더 일찍 연락이 왔었다면, 그렇게 빨리 LED회사 입사를 확정하지 않았을 텐데. 기상청에는 이미 퇴사의사를 밝혔던 상태라 수습도 애매했고, 그래서 그냥 다녀보자는 마음으로 입사를 결정했었다. 만약 반도체 회사 비자 승인이 안 나면 이곳에서 계속 일할 생각도 했던 거고. 그렇게 코트라, 기상청, 가족협회에 이은 나의 영광스러운 네 번째 회사는 주로 한국의 대기업 S사, L사의 벤더 LED회사였다.
- Field Apllication Engineer의 약자로, 고객 기술 지원 서포트를 주로 한다. 고객사에서 제품을 적용할 때 기술적인 문제해결을 담당한다. 제품이 팔린 이후로 불량이 생겼을 때, 그때 이슈도 대응한다. FAE 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은 내게 꽤 의미 있었다. 기술지원이 주 업무였지만, 고객사에 직접 제품을 설명하고 설계 적용 시 발생하는 이슈를 해결해야 했다. 겨우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긴 했지만, 만약 내가 중국인 남자친구가 없었고 한국에 살았더라면 이 직무를 계속했을 것 같다. 뼈 빠지게 고생해서 복수전공을 했던 것의 보상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 결정적인 건 꼰대스러운 분위기
외국계라 기대했지만, 실제 분위기는 ‘보수적인 대만식 제조업체’에 가까웠다. 특히나 대표가 한국의 잘못된 음주문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갑 회사(대기업)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술을 잘 먹는 게 덕목’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모든 제조업이 그렇다 할 수 없으나, 어쩔 수 없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가 꼰스러웠다. 외국계 기업이라 해도, 결국 뿌리는 대만회사이기 때문에 한국회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음주'란 '갑'회사에게 제품을 납품해야 하는 '을'입장의 하청업체의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덕목이라 이해를 해보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 지나치게 술을 많이 강요했다.
물론 모든 제조업이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현장 중심이라는 특성상 위계질서가 강하고, 보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존재했다. 외국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대기업의 벤더사라는 현실적 비애도 분명 있었다. 고객이 갑인 구조 속에서 을로서의 태도와 입장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단점만 있었던 건 아니다.
1. 해외 워크숍
2. 자기 개발비, 통신비 등 복지도 준수했다
3. 점심시간도 유연해서 11시~2시 사이 1시간 자유롭게 쉴 수 있었다
한국의 정형화된 시스템에 비해 일정이나 근무 환경 자체는 유연한 편이었다.
이 회사를 퇴사하겠다고 결심한 건, 단지 남자친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에서의 커리어’가 나에겐 더 현실적인 방향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업무 외적 분위기가 너무 안 맞았다.
기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내 역량, 중국어와 복수전공이 맞닿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이 직무였는데... '회사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됐다.